빠삐용 옷을 입고 곤돌라의 노를 젓고 있는 베네치아의사공들. 실제로 보면 키도 크고 굵은 팔뚝에 아주 미남들이다. 하지만 성격은 결코 상냥하지 않다.

CHOPIN: Barcarolle in F sharp major op. 60

뱃노래 (barcarole)라는 형식의 곡이 있다. 베니스에 가면 경험하게 되는 필수관광 코스인 곤돌라의 노를 젓는 사공들이 부르는 가벼운 노래인데 그 멜로디가 잔잔하고 아름다워 성악곡에서 기악곡으로까지 발전했다. 잘 알려진 곡은 멘델스존이 작곡한 무언가 중 뱃노래, 그리고 오펜바흐이 남긴 ‘호프만의 이야기 중 뱃노래’가 있고 쇼팽의 뱃노래가 또 유명하다.

오늘 소개하는 이 곡은 쇼팽이 남긴 유일한 뱃노래인데 깊이 있는 선율, 복잡한 형식, 그리고 쇼팽 특유의 낭만성을 잘 살린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잔잔한 파도에 부딪히며 천천히 흔들리는 배위에서 느끼는 여유, 낭만을 잘 표현한 곡이다. 그러나 당시 쇼팽이 처해있던 상황은 결코 여유 같은 것을 느낄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쇼팽은 죽음 직전까지 폐결핵으로 고통을 받았고 몇 사발씩 피를 토해내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마땅한 거처도 없이 떠도는 비참한 신세였다. 그리고 이렇게 고통 받는 쇼팽의 곁에는 쇼팽의 연인으로 유명한 조르주 상드(George Sand)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관계가 병약한 천재를 사랑한 한 여인의 헌신, 지고지순했던 사랑 정도로 알고 있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도 않다. 혹시라도 쇼팽을 몽환적인 낭만, 신비하고 치명적인 매력만을 가진 작곡가, 피아니스트로 생각하셨다면 조금은 생각을 달리 해보시길 권한다.

아파죽겠는데 무슨 사랑? 무슨 낭만?

조르주 상드(George Sand) 여사. 쇼팽과의 염문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기 전에 그녀는 페미니즘 문학에 한 획을 그었던 유명 소설가이자 자유연애가, 페미니스트였다. 항상 남자복장에 담배를 물고 다녔다. 성적 매력은 전혀 없었다고 전해진다.

쇼팽은 20살이 넘어서부터 파리에서 생활하였고 연주회를 통해 이름을 알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고 결정적으로 건강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연주회를 개최할 수 없게 되자 악보판매, 피아노 레슨 등으로 연명하며 힘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쇼팽이 슈베르트만큼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쇼팽은 순금으로 치장한 최고급 마차에 비싼 장신구를 몸에 걸치고 다녔고 경제관념이 없어 번 돈을 풍덩풍덩 쓰는데 바빴다. 결국 쇼팽의 곤궁함은 그가 자초한 부분도 컸다.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라는 고향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약혼까지 했지만 결국 파혼하였고 리스트와 세기의 염문을 뿌린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의 소개로 만나게 된 여인이 바로 운명의 여인 조르주 상드이다. 또 하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쇼팽과의 헌신적인 사랑 때문에 이 상드라는 여인이 청초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천사 같은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전혀 거리가 멀다. 상드는 전투적인 사상을 지닌 페미니즘 소설가였고 남자 복장에 담배를 꼬나 물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때문에 쇼팽 역시 상드에 대한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운명처럼 이끌려 사랑을 불태웠고 상드의 연인인 펠리시엥 몰피라는 남자가 자꾸 나타나 두 사람을 괴롭히자 결국 도피행각을 벌이게 된다. 지중해 스페인에 있는 마요르카(Majorca)라는 작은 섬이다.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는 마요르카. 하지만 쇼팽과 상드에겐 저 아름다운해변을 즐길 수 있는 낭만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쇼팽은 이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마요르카 섬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행복한 도피처였느냐 하면 절대 아니었다. 따뜻한 남쪽의 섬에서 병을 치료해보겠다고 왔으나 두 사람은 섬의 원주민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다. 결혼을 한 남녀도 아니었고 게다가 남자복장을 하고 다니는, 결혼까지 한 유부녀 상드의 모습은 비호감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허구한 날 피를 토해내는 결핵환자라는 것이 들통나자 집주인은 두 사람을 쫓아냈고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간신히 연명하는 식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돼지를 운송하는 화물차에 몸을 싣고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세이유에서 요양하며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쇼팽은 여름을 상드의 별장에서, 겨울은 파리의 아파트에서 지루한 생활을 하였다. 약 5년간의 기간동안 쇼팽은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으나 건강은 더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상드 역시 쇼팽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었다. 자신이 쓴 소설에 쇼팽을 비열한 인물로 빗대어 표현했고 자신의 별장에 있는 쇼팽의 그랜드 피아노를 쇼팽에게 보내는 것으로 약 10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이때가 1847년 9월이다. 그리고 쇼팽은 더더욱 건강이 악화되었고 영국에서 마지막 연주여행을 마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849년 10월 17일에 친구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이 뱃노래는 상드와의 동거생활 막판, 쇼팽이 가장 왕성한 창작의지를 불태우던 1845~1846년 사이에 작곡된 것이다.

쇼팽이 살았던 짧지만 강렬했던 삶 속에서 슬픈 낭만 같은 걸 찾으며 감정이입을 하기엔 그는 너무 건강이 좋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안겼다. 상드는 일방적으로 쇼팽에게 이별을 고했고 상드와의 이별 이후 쇼팽은 삶의 의미, 욕구, 창작의 혼마저 다 잃어버렸다. 쇼팽의 임종에도 상드는 없었다. 대신 쇼팽을 친아버지처럼 살갑게 따랐던 상드의 딸 솔랑주 클레장제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상드에게 매몰차고 감정이 매말랐다고 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대다수 인물의 전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긴 하지만 쇼팽의 생애를 서술한 전기 역시 과도한 낭만성에 매몰되어 있다. 쇼팽이란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팩트로만 보면 뛰어난 음악가였고 조국을 향한 뜨거운 심장을 가진 애국자이긴 했지만 그렇게 미화해줘야 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쇼팽의 사후 그의 지인들이 전하는 회고담은 일관된 사실이 없고 서로 제각각이며 상드의 자서전에 나오는 쇼팽과의 사랑이야기 역시 객관적인 팩트보다 철저히 상드 본인의 관점에서만 전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뱃노래의 명반

치머만이 남긴 걸작 음반 중 하나. 일전에 소개한 발라드 1번과 함께 수록된 음반이다. 이젠 더 이상 치머만이 남긴 쇼팽의 독주곡은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니 이 음반은 필청소장이라고 해도 되겠다.

쇼팽의 대표명곡 중 하나인 이 곡은 그 명성에 걸맞게 많은 음반이 있다. 그 옛날의 대표명인 루빈스타인, 그보다 더 옛날의 명인 코르토, 체르카스키, 그리고 쇼팽 콩쿨이 배출한 스타들인 아쉬케나지, 폴리니, 아르헤리치 등등 수많은 쇼팽의 명인들이 이 곡을 다 녹음했다. 너무 옛날 사람인 루빈스타인의 음반보다는 정확하고 깔끔한, 순도 100%의 연주를 자랑하는 크리스티앙 치머만의 연주로 감상하겠다. 치머만은 다소 느린 템포로 천천히 연주한다.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웠던 자신의 삶 속에서 느끼고 싶었던, 배 위에서 흔들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며 유유자적하고 싶었던 쇼팽의 여유를 잘 표현하고 있다.

Krystian Zimerman
녹음: 1987/07 Stereo, Digital
장소: Grosser Saal, Rudolf-Oetker-Halle, Bielefeld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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