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IE: Gymnopédies

독주곡 2011. 6. 21. 19:19 |

사진작가 Andrej Glusgold가 사진으로 표현한 짐노페디. Gymnopédies의 gymnos는 벌거벗은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가 되겠다.

SATIE: Gymnopédies

금빛 물방울이 자연스레 떨어지는 것처럼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피아노 곡 하나 더 나간다. BGM의 대표주자, 에릭 사티가 남긴 너무도 유명한 곡인 Gymnopédies이다. 이 곡은 세기말의 작곡가 사티가 남긴 수많은 곡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며 사티의 이단아적인 시대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곡으로 평가 받는다. 영화, 드라마, CF 등 많은 매체에서 BGM으로 쓰여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클래식 음악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짐노페디라는 이 어려운 단어는 그리스어로 gymnos(벌거벗은)와 pais(청소년)이 합쳐진 말로 벌거벗은 소년이라는 뜻이다. 이 벌거벗은 소년이 스파르타의 연례 제전에서 신을 찬양하며 추는 춤을 음악으로 형상화 시킨 것이다. 그런데 벌거벗은 소년이 추는 춤이라면 광기 어린 춤이어야 어울릴법한데 사티는 너무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피아노 곡으로 작곡하였다. 이는 작곡가 사티가 박물관에서 본 도자기인 암포라(amphora)에 그려진 제전의 모습에서 신비스러운 매력을 느끼고 이 곡을 작곡한 것이다. 모두 세 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1번이 가장 유명하다. 제1곡은 느리고 비통하게(Lent et douloureux), 제2곡은 느리고 슬픈(Lent et Triste), 제3곡은 느리고 무거운(Lent et Grave)이다.

근엄한 박물관에서 이런 도자기를 보고 미치광이 춤을 연상하는 곡을 쓰는 것도 무리가 아닐까?

잔잔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나른한 분위기 속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폼 잡는데 그만인 짧은 곡일 뿐이겠지만 이 곡은 시대에 대한 반항정신, 처절했던 가난과 고독이 함께 녹아있는 곡이다. 이 곡의 작곡가 에릭 사티는 누구 못지않게 가난과 냉대, 설움과 핍박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다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너무 시대를 앞서나간 급진적이고 시대반항적인 사상 때문이었다. 이토록 잔잔하기만 한 피아노 곡을 작곡한 작곡가의 삶이라곤 믿기지 않는 작곡가 사티의 삶을 알아본다. 글이 많이 길다. 지겹고 피곤하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다

평생 단 하나의 연인이었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이 그려준 사티의 초상화. 처절했던 독신생활을 마쳤던 그의 방에도 걸려 있던 그림이었다.


사티는 1866년 프랑스 옹플레르에서 태어났고 4살 때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사하였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 밑에서 성장하였으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엔 다시 재혼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13살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교수들 눈에는 전혀, 전혀 가르칠 수 없는 학생이었다. 무척이나 형식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그의 음악스타일은 당시 교수들의 눈 밖으로 벗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찮은 능력, 게을러 터진 학생이라는 악평을 받으며 결국 퇴학을 맞고 2년 후에 재입학 하였지만 역시 교수들의 눈엔 이상한 학생일 뿐이었고 그 시점에서 사티는 군입대를 하게 된다. 하지만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혐오하는 그가 상명하복식의 군대생활을 제대로 버틸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군대에서도 탈영하는 문제아가 되어버렸다.

유년기시절부터 범상치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티. 그 영향 때문인지 그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고 자신을 둘러싼 주변환경에 불만이 많았으며 도전적이고 반항아적인 성격을 완성해나가게 된다. 다행히도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기에 그가 후세에서나마 위대한 작곡가, 전위예술의 선각자로 인정받게 되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사회부적응자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세상이 맘에 들지 않고 내가 추구하는 예술세계와 괴리가 있다 한들 그저 현실은 시궁창일 뿐. 사티앞에 주어진 현실은 그저 가난한 작곡가 지망생일뿐이었다. 가난에 허덕이던 사티는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1887년, 21세부터 몽마르뜨 언덕에 출근도장을 찍게 되는데 몽마르트에 있는 Le Chat Noir(르 사뉴아르,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바로 Le Chat Noir라는 곳에서 아주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이 곳은 작곡가 드뷔시를 비롯해 수많은 프랑스의 문화예술인들과 예술가 지망생들이 종일 죽때리고 있는 아지트였고 사티는 이 곳에서 많은 예술인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굉장히 독특한 음악세계를 완성해나가기 시작한다. 그가 작곡한 곡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말라붙은 태아, 자질구레하고 유치한 담화, 말 많은 사람, 개를 위한 나른한 전주곡, 개를 위한 정말 나른한 전주곡 등의 식이다. 그리고 그의 명곡인 짐노페디는 바로 이 시기인 1888년에 작곡되었다. 훗날 그의 절친인 드뷔시가 관현악으로 편곡하여 사티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몽마르뜨에 있는 유명한 캬바레 르 샤누아르. 19세기 후반 파리의 유명 예술인들의 사랑방인 곳이다.

사티가 이 곡을 작곡한 동기, 의도는 분명하다. 사티는 자신이 작곡한 짐노페디를 감상할 때 집중, 긴장하지 말고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딴짓하면서 들으라는 것이다. 카페에서 이야기하면서, 차 마시면서 듣는 음악을 어떻게 집중하면서 들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냥 딴짓하면서 듣되 카페에서 발길을 옮길 때 뭔가 아련한 잔상이 남아 다시 이 카페를 찾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작곡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의도는 당시 사티가 살았던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예술 사조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 반감이 나타나있다. 당시 바그너로 대표되는 후기 낭만주의가 판치고 있던 시절의 음악예술이란 잔뜩 경직된 상태로 손에 땀을 쥐고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퍼포먼스들이었다. 그러나 사티는 음악이란 그렇게 갑빠 잡으면서 들어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자유롭게 즐기면 그만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으로 봤을 땐 지극히 이단아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단아적인 사상은 단순히 세상에 불만을 가진 치기 어린 자의 마구잡이식이 아닌, 논리적이며 체계적이었고 탄탄한 지식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작곡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Vanity Fair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하는 평론가이기도 했고 다다이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안티 바그너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다니기도 하였으나 당시 무명의 가난한 작곡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은 없었기에 그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그의 음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1963년에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도깨비 불’에서 사티의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면서 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주목하게 된 사람들이 사티의 음악을 재발견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도 못했다. 가난하고 현실성 없는 엉뚱한 소리나 하고 다니는 건달 예술가에게 눈길을 주는 여인은 없었던 것이다. 1893년에 화가이자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기도 했으나 6개월뿐이었고 발라동에게 버림받은 후엔 극도의 불안감, 비탄에 잠겨 ‘짜증(Vexations)’이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방안의 창문을 걸어 잠근 어두컴컴한 방에서 홀로 작품활동만을 하며 쓸쓸하고 가난하게 살았던 사티는 결국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경화증으로 1925년, 59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난하고 외로웠던 사티는 남겨진 가족조차도 없이 그렇게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만을 남기고 떠나간 것이다. 발라동과의 이별 이후 파리 근교의 가난한 아르퀼(Arcueil)의 한 아파트. 그 곳에서 사티는 무려 25년의 세월간 어느 누구도 자신의 독방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서야 친구들이 그의 독방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독방엔 그와 발라동이 서로 그려준 두 사람의 초상화, 그리고 발라동에게 부치지 못한 300여 통의 편지가 유서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풍만한 육체의 소유자 수잔 발라동. 유명 화가들의 모델, 연인인 동시에 유명한 화가이기도 했다. 주요 관심분야는 누드화였다.

사티가 했던 말이 있다. 나는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왔노라고. 사티는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헛소리나 지껄이는 위인일 뿐이라며 비웃을 뿐이었지만 그는 확고한 신념과 탄탄한 지식, 논리성을 밑바탕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인정받고 싶었다. 1905년에 스콜라 칸토룸 학교에 만학도로 입학하여 1908년에 보란 듯이 수석으로 졸업한 것이 좋은 예다. 비록 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인정했을 뿐이었던 사티의 음악은 훗날 전위예술의 선구자, 뉴에이지 음악의 시조라는 극찬과 함께 재조명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세상을 향해 외쳤던, 외치고 싶어 했던 작은 목소리는 세상을 떠난 후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가구 음악(musique d’ameublement)-음악은 가구 같아야 한다.

집안의 가구는 편안하다. 있을 땐 모르지만 없으면 안되는 편안함을 주는 가구. 사티는 음악이 가구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티가 외치고 싶어했던 것은 음악은 가구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고 음악은 가구다? 그만큼 편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물처럼 공기처럼 항상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 녹아 들어야 한다는 것을 사티는 강변했다. 이런 사티의 노력이 훗날 빛을 발해 가구음악이라는 신조어와 장르도 생겨났고 이 가구음악의 시조로 당연히 에릭 사티를 꼽는다. 그러나 에릭 사티가 꿈꾸었던 가구 같은 음악이 무형식을 추구했다 한들 아무런 생각 없는 미친놈이 휘갈긴 곡은 절대로 아니다. 아주 치밀한 화음의 구성을 계산해서 고심 끝에 작곡한 곡들임은 분명하다.


음악은 가구 같아야 한다는 것은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또한 내 블로그에 늘 찾아오시는 많은 분들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라는 것. 알고 보면 그렇게 근엄하게 가오 잡고 어려운 용어 써가면서 들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다른 사람들의 홈페이지에 가보면 알 것이다. 어떤 식으로 꾸며놨는지. 그리고 내 블로그와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블로그 이름부터 무슨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오솔길,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하는 작은 정원 등의, 마치 내 몸이 한 마리 닭이 되는 듯한 이름을 지어놓고 근엄한 표정 짓는 작곡가의 사진 한 장과 음악평론가들이 써놓은 근엄하고 딱딱한 글을 고대로 베껴놓는 식이다.

이런 블로그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게 재미있나? 그렇지 않다. 때론 쌍스러운 말도 써가면서 직장에서 몰래 보는 사람 정신 번쩍 들라고 누드사진도 걸어놓고 여신 제시카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사진도 걸어놓으면서 근엄하지 않게, 편안하게, 음악 한 곡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블로그를 꾸미는 것이 좋은 것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 생각도, 지식도 없이 글을 쭉쭉 갈겨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료조사를 위해 웹 브라우저에 10개 이상의 탭을 띄워놓고 이렇게 저렇게 문장을 바꿔가면서 안 돌아가는 머리 굴려가며 나름대로 무지 고심하며 쓴 글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스크랩 금지까지 해놓은 글을 베껴가는 것까진 내가 뭐라고 할 수 없겠지만 사전에 양해를 구하고 출처는 정확히 밝히란 말이야 이 양심 없는 것들아!


음악=가구라는 이론에서 또 한 가지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아끼는 후배가 있는데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 예의와 배려가 몸에 밴 아주 건실한 청년이었다. 이 후배가 학창시절 소개팅을 나갔는데 여대에서 기악을 전공하는 음대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그릴 수 있었던,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 또렷한 이목구비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우아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고 한 마디로 이놈을 한 눈에 뻑가게 만든 것이다. 그에 비해 내 후배는 반듯한 외모에 힘든 공수부대를 지원해서 갈 정도의 건실한 사상을 가진 청년이긴 했지만! 느릿하고 어눌한 말투, 게다가 오랜 서울 생활을 했지만 사투리를 고칠 수 없는 게 흠이었다.


결국 두 세 번 만나다가 헤어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음대생은 아는 게 음악인지라 음악에 대한 대화를 하고 싶었는데 오보에가 뭔지, 클라리넷은 또 뭔지, 트럼펫과 섹소폰을 구별 못하는 이 놈의 무식함에 혀를 내두르며 결국 이별통보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후배도 비록 시골 깡촌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수재소리 들으며 서울까지 유학 왔고 지역 유지의 아들이기에 자존심 하나는 아주 강한 놈이었는데 그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히고 만 것이다. 어느 날은 나와 술을 마시면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 자리에 형이 나갔다면 좋았을 텐데.”
“왜?”
“형은 음악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말빨도 좋잖아요. 말끝마다 입 꼬리가 올라가면서 나를 은근히 비웃는 모습이 존나 재수없는 년이었는데 형 같으면 음악 이야기 해도 전혀 꿀릴 것 없고 아주 묵사발을 내놓고 빠이빠이 했으면 통쾌했을 테니까요”
“글쎄. 그렇긴 한데...-_-“

공대생 출신들이 술 마시면서 해대는 아주 재미없는 유머가 하나 있다. 일명 편미분 귀신이란 건데 주로 사용되는 장소, 상황이란 것이 나는 공대생이다라고 자랑하고 싶어지는 자리, 혹은 단체 미팅에서 따돌림 당할 때 괜히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켜보고 싶어지는 자리에서 써먹는 유머이다. 평화로운 자연수 마을에 미분 귀신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0으로 만들어 버리자 방정식 마을에서 출동한 엑스제곱 장군이 나타나 미분귀신과 싸우는데 세 번의 미분으로 엑스제곱 장군까지 0으로 만들고...뭐 암튼 이런 아주 재미없는 이야기가 있다. 중요한 건 이걸 말하고 다니는 애들은 나는 공대생이다라고 자랑질하고 싶어하지만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여인들이여. 그대들 앞에서 공돌이들이 편미분 이야기하면서 '그것도 몰라? 이런 무식한 년!' 하며 속으로 비웃으면 짜증날 것 같지? 마찬가지다. 한국사회의 건실한 청년이 클라리넷을 모르면 어떻고 현악사중주의 악기구성이 뭔지 또 모르면 어떤가.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고 괜히 어줍잖게 원서 품에 안고 생머리 날리면서 다니지 말아라. 그대의 가치는 몇 권의 원서를 들고 몇 곡의 클래식 음악을 듣고 다닌 것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애쓰는가에 대한 그 배려심, 배려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미소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니까.

프랑스 피아니즘을 가장 잘 표현하기로 소문난 거장 파스칼 로제의 피아노 연주로 감상하겠다.

ps 1) 사티가 얼마나 엉뚱하고 파격적인 작곡을 했는지 앞서 언급한 ‘짜증’이란 곡의 예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곡은 하나의 주제를 840번 반복하게 되어 있다. 84번이 아니고 840번이다. 이런 곡들을 내놓으면 그때나 지금이나 미친놈 소리 듣기 딱일 것이다. 근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미친 곡을 장 이브-티보데(Jean-Yves Thibaudet)라는 피아니스트가 데카에서 발표한 음반에 녹음을 한 것이다. 연주시간만 18시간이 걸린다는 이 곡을 무슨 이유로 녹음했을까?


ps 2) 내 후배는 그녀와의 이별 이후 서울출신의 여대 다니는 여자, 그리고 예술을 전공하는 여자에게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난 그때 그 후배에게 이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 그 여자가 너를 무식해서 찬 게 아니고 니 액면가부터 그냥 맘에 안 들었는데 적당한 구실을 찾아서 찼을 뿐이라고. 니가 쇼팽콩쿨에서 입상하는, 있을 수 없는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게 된들 그 여자가 너를 좋아하겠냐고.


Pascal Roge (Piano)
녹음: 1983/05 Stereo, Digital
장소: Unknown

전곡 연속재생


1. Lent et douloureux


2. Lent et Triste


3. Lent et Grave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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