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VEL: Jeux d`eau

독주곡 2011. 6. 19. 02:48 |

물은 때때로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소재로 쓰인다. 석양에 금빛으로 빛나는 저 아름다운 물빛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가.

RAVEL: Jeux d'eau

천재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남긴 피아노 소품 ‘물의 유희(Jeux d'eau)'는 라벨이 작곡한 많지 않은 피아노 독주곡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곡으로 인상주의 피아노 곡의 최초의 성공작으로 평가 받는다. 라벨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곡으로서 일상적인 사물의 관찰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라벨의 음악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남긴 또 하나의 걸작 거울(Miroirs)이란 작품도 이와 같은 예이다. 한 방울의 물이 통통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느낌, 유유히 흐르는 느낌, 그리고 분수처럼 세차게 뿜는 느낌까지를 모두 5분 여의 짧은 피아노 소품곡에 담아내고 있다.

라벨은 리스트의 순례의 해(nnées de Pèlerinage Première Année) 중 에스테장의 분수 (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에서 물의 표현기법을 배워서 작곡하였다. 라벨이 25세에 작곡하였고 파리 음악원 시절에 그의 작곡 스승이었던 가브리엘 포레에게 헌정하였다. 인상주의 음악답게 처음 들었을 때 웬만큼 인상 쓰면서 집중하며 듣지 않으면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멜로디의 곡은 아니다. 그래도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쫑긋이 세워 느껴보시기 바란다. 한 방울의 물이 또르륵 굴러가며 퐁당하며 빠지는 소리, 그리고 분수처럼 크게 뿜어내는 소리, 이 모든 걸 한 대의 피아노로 표현이 가능했던 모리스 라벨의 천재성까지도.

모리스 라벨에 대해선 그의 대표 관현악곡인 볼레로에서 이미 한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고집스런 성격, 그 성격에서 비롯된 음악세계에 대해선 조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겠다.

고고하고 도도하게-타협도, 굴복도 없다

1차대전에 참전한 모리스 라벨. 훗날 함께 했던 전우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쿠프랭의 무덤이란 곡을 작곡하였다. 신검 불합격으로 갈 수 없었던 전쟁터에 기어이 조르고 우겨서 참전하게 된다. 진짜 멋진 사나이 라벨.

모리스 라벨의 성격은 대단히 치밀하고 깔끔하며 완벽함을 추구했던, 극심한 편집증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복장을 갖춰 입는 것을 좋아했던 파리지앵, 귀족의 전형이었다. 한 가지 예로 생의 말년에 장기간의 미국 여행을 떠날 때 40여벌의 잠옷을 준비했다는 일화도 있다. 대작 볼레로를 히트시키며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였고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성공한 작곡가였지만 사실 그의 젊은 시절은 좌절과 실패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라벨은 자신을 좌절케 했던 시대의 부조리에 굴복하지 않았고 쉽게 타협하지도 않았다. 너무 고집스러웠기에 모순덩어리처럼 보여지는 거장, 그가 바로 모리스 라벨이다.

라벨은 천재의 산실인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연속되는 낙제에 실망하고 자퇴하고 만다. 최고의 명문 학교를 자퇴한다는 것부터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타협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인데 이 때문에 파리 음악원의 교수들과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다. 결국 작곡과로 재수강하여 가브리엘 포레의 수하에서 작곡수업을 계속 하며 바로 오늘 소개하는 물의 유희를 작곡하여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프랑스 작곡가들에겐 출세의 등용문이었던 로마대상에 출전하였지만 번번히 낙방하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결국 1905년의 로마대상에서는 아예 예선탈락이라는 충격을 맛보게 되었는데 라벨처럼 뛰어난 젊은 작곡가가 어찌하여 이처럼 미역국만 먹게 되는지 의혹이 불거졌고 로마대상의 공정성, 투명성이 의심받게 된다. 결국 그 의혹이 밝혀졌는데 로마대상 심사위원들의 제자들을 최종심사에 올렸다는 비리가 얽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로맹 롤랑(Romain Rolland). 로마대상 파문에서 적극적으로 라벨을 옹호했던 대표 지성인이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문제는 결국 프랑스의 유명 지성인들이 모두 라벨을 옹호하는 판국이 만들어졌고 파리 음악원장의 해임으로 비리사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리고 훗날 프랑스의 가장 유명한 국민작곡가로 대성공을 한 라벨을 위해 프랑스 정부에서는 예술가에게 내려지는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지만 이땐 오히려 라벨이 그 까짓 거 필요 없다며 거절, 자신의 젊은 시절에 상처를 안겨준 부조리했던 조국 프랑스에게 아주 통쾌한 복수를 하였다. 그러나 라벨이 조국 프랑스에게 평생 삐쳐있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1차대전이 발발하자 키가 작아서 군대에 못 간다는 걸 그렇게도 우기고 졸라서 운전병으로 자원입대 하였고 그렇게 어렵사리 간 군대에서 그만 교통사고로 제대하고 만다.

생사를 담보할 수 없는 전쟁터에 기어이 가겠다고 졸라댈 정도의 뜨거운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훈장은 또 줘도 안 갖는다며 도도하게 튕기는 자세. 150이 조금 넘었던 작은 키에 몸도 약해서 신검에도 탈락할 정도로 왜소했지만 그 얼마나 거인다운 풍모였단 말인가. 정말이지 단 하루를 살아도 모리스 라벨이란 사람처럼 멋있게, 쿠울하게,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도 않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많이 모순돼 보이지만 진짜 이 아저씨. 너무 멋있지 않아?

물의 유희의 명반

바흐부터 쇼팽, 슈만, 리스트, 라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곡가의 수많은 곡을 담아놓은 8CD 세트음반이다. 가격은 좀 쎄다.

라벨의 대표 피아노 곡 중 하나인만큼 아주 많은 음반들이 있다. 우선 프랑스 출신의 명 피아니스트 그룹이 남긴 음반을 명반의 대열로 맨 처음 꼽을 수 있겠는데 바로 코르토, 기제킹, 프랑소와, 로제 등의 음반이다. 특히 기제킹, 프랑소와 등은 라벨이 남긴 모든 피아노 곡의 첫 번째 선택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리히터, 길렐스 등의 옛날 소련 빨갱이 피아니스트도 이 곡을 녹음했으나 그들의 정서로는 라벨 특유의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음색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또 한 사람 반드시 추천해야 하는 연주자는 다름아닌 마르타 할매이다. 지금이야 푸짐해진 몸매에 젊은이들 실내악 반주나 해주는 넉넉한 인상의 할매가 되었지만 한창때는 날렵한 몸매에 무시무시한 타건을 자랑했던 아가씨였다. 그 아리따운 19세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도이치그라모폰이 계약을 맺고 처음으로발표한 음반에 수록된 물의 유희는 지금껏 시대를 뛰어넘는 명연으로 회자된다.

마르타 할매의 전설을 알렸던 역사적인 음반. 19세의 소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도이치그라모폰의 안목이 돋보이는 음반이 되겠다.

도이치그라모폰과 처음 음반녹음을 한 19세의 아가씨는 5년 후에 열린 쇼팽 콩쿨에서 만장일치 우승을 하며 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자신을 선택한 도이치그라모폰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였다. 오늘 소개하는 8CD 세트음반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처음으로 대형 메이저 레이블인 도이치그라모폰과 녹음한 이 음원이 수록되어 있다.

Martha Argerich (piano)
녹음: 1960/07/04-08 Stereo, Analog
장소: Beethoven-Saal, Hannover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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