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Albert Sterner가 그린 마왕. 5분여의 짧은 가곡에는 무려 네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한 사람의 성악가가 네 사람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이 곡을 작곡한 슈베르트. 그는 천재다.

LISZT: Erkönig (Transcriptions from Schubert)

같은 프란츠라는 이름을 가졌어도 그들의 삶은 극과 극이었다. 먼저 태어난 이는 비참의 극이었고 뒤에 태어난 이는 부와 명예, 인기, 존경의 극이었다. 그리고 뒤에 태어난 이는 먼저 태어난 이를 무척이나 존경하였고 수 십편에 이르는 그의 작품을 열심히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였다. 프란츠 슈베르트와 프란츠 리스트의 이야기다. 오늘은 프란츠 슈베르트가 작곡하여 독일 가곡의 신기원을 개척한 곡으로 평가받는 그 유명한 마왕을 프란츠 리스트가 훗날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한 곡으로 감상하겠다. 그리고 원곡인 가곡 마왕에 대한 설명, 편곡의 왕이었던 리스트의 업적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즐거운 감상시간 되시길.

프란츠 슈베르트-가곡의 왕, 마왕-가곡의 마왕

18세의 슈베르트가 남긴 걸작 중 걸작이며 독일 가곡의 신기원을 열었던 작품으로 기억되는 마왕. 이 작품이야 뭐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과서로 다 배운 내용일 것이니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한 번 짚고 넘어가보겠다. 18세의 소년이 작곡한 것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 천재적인 작품은 슈베르트가 남긴 거의 모든 작품이 다 그러하였듯이 작곡된 당시엔 전혀,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 비운의 작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본다. 마왕은 슈베르트가 18세에 작곡한 작품이며 작품번호가 무려 328번이다. 18세와 328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18세에 무엇을 했는지? 혹시 18세까지 328권의 책이라도 읽어본 적은 있는지, 328곡의 음악을 알고는 있었는지 반성과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슈베르트는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시를 읽고 크나큰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썼다고 전해진다. 요제프 폰 슈파운(Joseph von Spaun)이라는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슈베르트는 집에서 흥분한 상태로 괴테의 시를 큰 소리로 읽고 있었고 크게 영감이 떠오르자 책상에 앉아 일필휘지로 작품을 써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마왕’이라는 작품이 얼마나 천재적인 작품인지, 또 얼마나 시대를 앞서갔는지 알아본다. 우선 슈베르트는 이전의 리트(lied)의 형식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시도를 하였다. 노래하는 성악가를 위해 옆에서 조용히 반주해주는 피아노의 역할에서 벗어나 성악가와 대등한 입장을 취하며 극적인 효과를 높였다. 셋잇단음표로 시작하는 현란한 말발굽 소리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며 영화의 BGM의 역할을 하고 있다. 즉, 피아노는 반주가 아니라 성악과 피아노의 2중주의 전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슈베르트의 이와 같은 파격적인 노력 끝에 민요수준에 머물러 있던 독일의 가곡을 또 하나의 예술장르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하였다. 슈베르트가 가곡의 왕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바리토너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가 부르는 마왕. 다른 것보다도 내래이터-아버지-아들-마왕으로 이어지는 현란한 음성의 변화와 표정연기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겁에 질린 목소리, 음흉한 목소리, 다급한 목소리와 표정연기를 저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이 다 해내는 것이다.

늦은 밤, 다급하게 뛰는 말발굽 소리를 피아노 연주로 표현하고 이를 듣는 사람에게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전해주는 효과. 그리고 네 사람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맨 처음, 이 곡의 처음과 끝을 설명해주는 내레이터가 등장하고 아픈 아들을 다급한 심정으로 안고 가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이 아버지는 죽음을 목전에 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채찍질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겁에 질린 아들을 진정시키는 차분함과 긴장감이 함께 느껴진다. 그리고 잔뜩 겁에 질린 아들의 목소리도 등장한다. 아들은 이미 마왕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마왕이 보이지 않느냐며 외치고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아들을 덮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이를 유혹하는 마왕의 목소리가 있다. 마왕은 때론 음흉하고 나지막하게 때론 무섭게 아이를 다그치며 죽음의 문으로 인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내레이터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결국 집에 도착해보니 아들은 시신이 되어 아버지의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5분여의 짧은 시간에, 한 대의 피아노와 한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이토록 극적인 드라마를 표현할 수 있는 예술작품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걸 18세의 소년이 생각해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일이고 천재라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슈베르트가 이 곡을 작곡했던 당시엔 단 한 곡도 출판하지 못했던 철저한 무명의 18세 소년이었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이 곡의 악보를 출판사에 보내자 출판사입장에선 난색을 표했다. 당시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지나치게 어렵고 파격적인 악보 때문이었다. 셋잇단음표로 다다다다다~ 쉼 없이 갈겨대는 오른손 연주부터 시작해서 왼손의 연주도 무척 어려워 당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난곡이었다. 그래서 출판사에선 이 곡을 슈베르트에게 반송하였는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악보의 반송을 동명이인의 프란츠 슈베르트에게 보낸 것이다. 동명이인의 슈베르트는 당시 드레스덴의 궁정음악가로 꽤 유명했던 인물이었던 모양인데 이 슈베르트라는 사람은 이 악보를 받아보자 신경질부터 냈다고 한다. 어떤 무식하고 용감한 놈이 감히 위대한 궁정음악가인 나의 이름을 도용해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곡을 작곡했느냐며.

비참했던 음악가들의 인생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는 프란츠 슈베르트. 작곡가가 피아노도 없었고 오선지와 잉크를 살 돈 조차도 별로 없었다. 오인용의 정지혁 병장을 닮은 뚱뚱하고 못난 얼굴에 키는 작았고 성격마저도 내성적이어서 그 어떤 여자 사람도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돈받고 몸팔던 사창가의 창부들만이 그를 상대해주었다. 너무 슬픈 이야기.

출판사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도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당시 18세의, 단 한 곡도 출판한 적이 없는 무명의 소년이 작곡했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18세의 소년 프란츠 슈베르트가 작곡한 이 위대한 작품은 악보를 쓴지 6년이 지난 슈베르트의 나이 24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판이 되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op. 1번이다. 그리고 op. 2번은 마왕보다 일 년 전에 작곡한 물레질하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 D. 118)이다. 이 대목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고 싶다. 가난과 병마 속에서 신음하며 불행하게 살다 31세에 쓸쓸하게 죽었으나 후대에 이르러서야 위대한 작곡가로 칭송 받는 청년 슈베르트의 삶이 더 좋은지 아니면 당대엔 불행했던 청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명했지만 후대에 이르러선 그 불행했던 청년의 에피소드에만 등장할 정도로 완전히 잊혀져 버린 궁정음악가 슈베르트의 삶이 더 좋은지. 어리석고 인생의 배움이 짧은 나는 그래도 이승에서의 부와 영광이 훨씬 더 좋다. 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엔 유명해질 필요도 없고 그저 내 무덤에 침만 안 뱉을 정도만 되면, 나의 후손들이 때마다 가꿔주고 찾아와서 절해주면 나는 그걸로 족할 것 같다.

프란츠 리스트-편곡의 왕, 위대한 노예

프란츠 슈베르트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리스트의 위엄. 베를린에서 열린 리스트의 리사이틀의 풍경을 그렸다. 무대 밑에선 보석을 집어 던지며 숨 넘어가는 소녀떼와 누나떼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

19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업적 중 음악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것을 꼽는다면 바로 피아노 연주용 편곡작품을 엄청나게 남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리스트는 피아노라는 악기가 대중에게 보급되고 있던 시점과 맞물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작곡과 함께 엄청난 수의 작품을 편곡하였다. 그 일은 바로 피아노라는 악기가 음악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시키는 것이었고 그 노력의 일환으로 편곡한 작품의 수가 무려 300여 곡이 넘는다.

리스트가 편곡한 이 많은 작품들은 바흐의 작품처럼 대중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J. S. Bach는 당시의 사람들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였다. 후대의 음악인들-멘델스존, 리스트-의 노력이 없었다면 잊혀진 전설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작품들부터 시작해서 베토벤, 슈베르트, 로시니, 파가니니, 베를리오즈, 바그너 등의 작곡가들이 남긴 수많은 작품을 장르에 관계없이 피아노 곡으로 편곡했다. 그리고 리스트가 이렇게 엄청난 편곡작품을 남긴 노력의 대가로 피아노는 서양 중세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악기로 남게 되었다. 더 나아가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작곡한 서양 중세 음악이 전 세계에 보급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사랑 받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에는 바로 피아노라는 악기의 발명과 보급이 결정적이었다. 머릿속에서 어떤 악상이 떠올랐을 때 손쉽게 건반을 뚱땅거리며 악보에 옮길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건반을 눌렀을 때 정확한 음을 내고 많은 화음을 만들어내는 악기. 그것도 아주 저음부터 고음까지의 넓은 음역을 다 표현해낼 수 있는 악기의 발명은 말 그대로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한 가지 반대되는 예를 들자면 일본의 샤미센(三味線) 같은 악기만으로 베토벤 교향곡 같은 복잡한 곡의 악상을 어떻게 연주하며 악보를 적어낼 수 있을까? 정리하자면 피아노가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시기에 맞물려 리스트는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 무궁무진함을 확인하기 위해 수많은 곡을 편곡하였고 이를 세상에 알려 서양 중세음악이 전 세계를 제패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업적을 세운 것이다.

무려 300여 곡이 넘는 리스트의 편곡 작품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시간 많은 분들이 직접 찾아보길 권한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슈베르트의 마왕 역시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순수 피아노곡으로 리스트가 편곡한 것이며 슈베르트의 가곡(lied) 56곡을 편곡한 것 중 하나이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리스트의 편곡 방식은 Paraphrase와 Transcription의 두 가지로 나뉜다. 이중 Paraphrase는 원곡을 편곡자의 임의대로 바꿔놓는 것을 말하고 Transcription은 원곡의 분위기를 최대한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편곡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소개하는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의 편곡은 제목에서 나타낸 것처럼 Transcription이다. 슈베르트의 원곡과 비교해서 들었을 때 거의 흡사하다. Transcription을 하는 편곡자를 원작곡자의 노예라고 비유하는데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리스트는 노예,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노예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놀라게 할 실력을 갖추었으나 운도 지지리도 없었던, 시대의 아픔을 많이 겪어야만 했던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의 귀신같은 연주로 감상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베르만이 운빨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한들 그래도 말년에는 편안한 자유, 존경, 안락을 한 몸에 누리고 갔다. 원래 뚱뚱했던 몸매는 더더욱 주체할 수 없었을만큼. 사람 목소리가 들어가는 원곡보다는 좀 산만한 분위기에 거친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원곡보다는 감상하기에 불편한 느낌도 있겠지만 그래도 즐거운 감상되기실 권한다.

Lazar Berman
녹음: 1981/6/11 Stereo, Analog
장소: France. Live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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