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리허설 중인 작곡가겸 지휘자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하루 아침에 벼락출세한 이탈리아 음악계의 총아로 떠올랐으나 말년엔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곡절많은 삶을 살았다.

MASCAGNI: Cavalleria Rusticana - Intermezzo

19세기 후반과 20세기를 살았던 이탈리아의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남긴 걸작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의 유명한 간주곡을 소개한다. 이 오페라의 제목, 내용은 몰라도 이 곡은 너무도 귀에 친숙한곡이기에 아무런 거부감없이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곡이다.

이 곡을 작곡하여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된 27세의 청년 작곡가 마스카니, 그리고 이 오페라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겠다.

베리즈모(verismo)란 무엇인가?

사람은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 행동과 사고가 지배를 받는 것이 분명하다. 그 어떤 철학, 이념, 사상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 왔다.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사회는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사회가 정착이 되었고 이는 빈부의 심한 격차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사회를 좀 더 각박하고 치열한 경쟁의 장으로 만들게 되었다. 하루하루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속의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와 닿을 리가 없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때론 불편하지만 정확한 진실에 눈을 돌리게 되고 그 진실을 가감 없이 표현한 예술작품이 각광받는 것은 필연적인 시대의 요구일 것이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사회에 만연했던 사실주의, 자연주의, 좀 더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이탈리아 오페라에서의 베리즈모(verismo)란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들 사이에서 일어난 자연주의, 자연주의 운동도 그 흐름에 따라 생성, 소멸되었던 큰 흐름의 하나였다. 오페라의 본류인 이탈리아, 그 이탈리아의 젊은 작곡가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전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조인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심한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에선 요절한 천재 작곡가인 조르주 비제가 작곡한 카르멘이 크게 히트하며 진정한 인간사회에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오페라도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알게 해주었고 이는 이탈리아의 젊은 오페라 작곡가들에겐 그들의 예술적 지향점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베리즈모의 첫 번째이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마스카니가 작곡한 희대의 걸작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이다.

시골기사와 시칠리아의 결투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한글로 쓰면 열 글자인데 한 번에 암기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글자들이 조합이 되어 있는 이 심상치 않은 오페라는 이탈리아어로 시골기사, 시골 기사도라는 뜻이다. 원래 다혈질적이고 거침없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다혈질로 유명한, 또한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들의 고향으로 유명한 시칠리아섬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오페라이다. 단막극으로 이루어진 오페라이고 그 내용은 대단히, 정말 대단히 충격적이다. 시칠리아의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군대에서 제대한 혈기왕성한 청년 투리두, 그의 옛 애인 롤라, 그리고 롤라의 남편이자 마부인 알피오 사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배신, 치정, 음모, 욕정, 파멸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들은 세상에 넘쳐흐르는 수많은 정보들을 유용하게 읽어보시기 바란다.

어쨌든 이 오페라는 초연부터 대성공을 거두었고 작곡가 피에트로 마스카니는 가난한 피아노 교사에서 세계적인 작곡가로 벼락스타가 되었다.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에 대하여

말년의 마스카니. 시대의 흐름을 잘타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으나 결국 그 시대의 흐름때문에 루저가 된 굴곡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피에트로 마스카니는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빵집을 했고 그가 법률가가 되길 원했지만 결국 음악가가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발표하기 전엔 음악가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전전하고 있었다. 밀라노 음악원에서 그 유명한 푸치니와 동문수학하기도 했으나 지방의 3류 유랑극단에서 지휘자 생활을 하며 오페라와 친숙할 수 있는 계기를 쌓았고 그 이후 결혼하여 시골학교에서 피아노 교사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던 중 그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게 된다. 손쪼뇨라는 유명한 악보 출판사에서 단막 오페라의 현상 모집을 한 광고를 보고 즉시 오페라를 작곡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의 원작은 따로 있다. 이탈리아의 베르가라는 작가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에 마스카니의 친구인 타르지오니-토체티와 귀도 메나시가 각색한 대본에 곡을 붙인 것이다. 당시 베르가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연극으로 상연되고 있었는데 마스카니는 이 희극에 곡을 붙여 오페라로 만들기로 계획한 것이다.

마스카니는 숨막히듯 빠른 스피드로 신들린 듯이 8일만에 이 곡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현상공모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였고 그 다음해에 초연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그는 벼락스타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마스카니라는 작곡가가 뛰어났기에 이룬 성공으로만 보기엔 무리가 있다. 당시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베리즈모라는 거대한 철학적 흐름, 사조와 마스카니라는 작곡가의 뛰어난 작품이 절묘하게 맞물려 있기에 거둔 성공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확실한 사실이다. 이는 겨우 27세의 청년이었던 마스카니가 시대적 흐름을 잘 꿰뚫고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는 예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마스카니가 훗날 그 시대적 흐름을 보는 능력 때문에 말년에 매우 불우하게 지냈다면 이 또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마스카니는 그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지휘자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라 스칼라의 지휘자로 오르게 된다. 토스카니니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강단 있는 행동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되고 두 번 다시 밀라노에서 지휘를 하진 못했지만 마스카니는 그 토스카니니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여 그 자리를 지킨 것이다. 그 후 2차대전이 끝난 후 무솔리니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 재산을 몰수당하게 된다. 그리고 로마의 한 호텔방에서 2차대전이 종결되기 얼마 전에 쓸쓸하게 죽음을 맞고 만다.

주유소에 고깃덩어리로 매달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무솔리니와 일당들. 유튜브에 가면 동영상도 있으니 찾아보시기 바란다. 19금이라서 아무데나 갖다 붙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부역이란 행위에 대해 그 당시를 살지 않은 사람들은 비난일변도로 욕하기 바쁘지만 사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선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 부역자라는 부끄러운 말로 기록될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승리자로 기록될 것인지는 대단히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 분명하다. 만일 무솔리니가 주유소에서 흉측한 고깃덩어리로 발견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했다면? 물론 그럴 리는 없고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마스카니라는 예술가의 삶도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들 중엔 무솔리니의 시대를 살았던 지금의 영감님 세대들은 지금도 무솔리니를 아주 존경하고 좋아한다고들 한다. 이탈리아 전역에 깔린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비발디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외딴섬 베니스로 가는 육상도로, 그 외에 부강한 이탈리아 건설을 위한 산업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무솔리니였다. 마스카니라는 작곡가. 잘은 모르겠지만 훗날 자신이 부역자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 기록될 것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없이 협조했던 나약한 지식인이라기 보다는 무솔리니가 진정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터메조(Intermez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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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오프닝씬으로 꼽히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걸작 성난 황소의 오프닝씬이다. 이장면 때문에 카발레리아 루스카티나의 간주곡이 더 유명해졌다.

오페라를 잘 즐겨 듣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은 보통 오페라의 유명한 서곡들만을 즐겨 듣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오페라의 서곡은 그 오페라를 대표하는 얼굴과도 같은 곡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페라에서 간주곡, 인터메조가 가장 유명한 특이한 곡이 바로 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이다. 이 오페라에서 유명한 곡을 찾는다면 막이 오르기 전에 시작하는 ‘전주곡과 시칠리아’,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등도 있겠지만 너무도 친숙한 멜로디인 이 간주곡, 인터메조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이 곡이야말로 이 오페라의 대표, 얼굴이다.

고급 세단 승용차 선전할 때 BGM으로 은은하게 깔려 분위기를 더해주는 효과도 있고 또한 수많은 CF의 BGM으로도 쓰이는 곡이기에 너무 친숙하다. 그리고 예전 로버트 드 니로라는 시대의 명배우를 있게 만들어준 20세기 최고의 복싱영화인 성난 황소(Raging Bull)에서 오프닝 씬의 BGM으로 깔려 더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성난 황소라는 영화는 분노의 주먹이란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봉준호 감독이 인생 최고의 영화로 꼽는 걸작 중의 걸작이며 이 오프닝 씬은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오프닝씬으로 주저 없이 꼽히기도 한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명반

카라얀과 밀라노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이 남긴 1965년 음반. 이 곡의 가장 보편적이고 잘된 명반으로 꼽힌다. 이탈리아 오페라까지 맘대로 주무르며 명반을 만들어내는 카라얀.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


마스카니 본인이 지휘한 옛날 음반부터 많은 음반들이 나와있다. 대략 에레데, 세라핀의 1950년대 반과 카라얀의 1965년 반, 그리고 시노폴리의 1989년 반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구하기도 쉽다. 나는 이 중 카라얀-밀라노 스칼라 극장 관현악단, 합창단이 녹음한 1965년 음반을 갖고 있는데 환상적이고 유려한 관현악, 그리고 극적인 합창진이 어우러진 명반으로 평가 받는다. 무엇보다 노래를 전면에 내세우고 관현악을 뒤에서 서포트한다는 본연의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를 받는다.

Carlo Bergonzi
Fiorenza Cossotto
Giangiacomo Guelfi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Coro e Orchestra del Teatro alla Scala

녹음: 1965/10 Stereo, Analog
장소: Milan, Teatro alla Scala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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