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하고 있는 로시니의 캐리커쳐. 로시니는 천재 작곡가임과 동시에 먹는 것을 너무 너무 좋아한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프랑스 요리 중 알라 로시니란 이름이 붙은 음식도 많이 있고 그를 기념하기 위한 요리 경연대회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미식가를 위한 요리 연구서적까지 집필할 정도로 로시니의 요리에 대한 사랑은 정말 각별했다.

ROSSINI: Guillaume Tell - Overture

이탈리아 오페라의 본격적인 성공시대를 열었던 작곡가 로시니는 그 명성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걸쳐 있었으며 당시 그의 인기는 동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베토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를 능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베토벤, 베를리오즈 역시 로시니의 오페라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로시니가 작곡가로 활약했던 시절은 정확히 20년이었고 너무도 이른 나이에 절필선언을 하고 만다. 그것이 자신의 재능에 한계가 왔음을 느낀 것이었다면 비극적인 이유겠지만 돈, 인기가 풍족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많았던 로시니가 더 이상의 작곡활동에 흥미와 동기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대부분의 천재 작곡가들의 삶이 천재적 능력에 대한 반대급부로 불행한 가족사를 비롯하여 슬프고 처절한 삶을 살았던 것에 비해 로시니의 삶은 그야말로 상팔자 중의 상팔자를 삶을 76세까지 살았다. 그리고 사후에도 그를 존경하는 제자인 베르디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레퀴엠을 작곡할 정도로 후학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그야말로 복받은 삶을 살다간 사람이었다.

오늘은 로시니가 작곡한 40편의 오페라 중 그의 작곡인생 마지막에 발표한 대작 오페라인 ‘윌리엄 텔’의 서곡을 소개한다. 이 작품은 로시니가 남긴 40편의 오페라 중 현재까지도 많이 알려진 몇 안되는 작품 중의 하나이며 경쾌하면서 웅장한 멜로디가 어느 누구에게도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는, 가장 쉽게 접할 수 있고 친해지기 쉬운 클래식 음악 중 하나이다. 거 왜 햄버거 선전에도 이 멜로디가 나오지 않던가? 삼천원, 삼천원, 삼천원….하면서 빠른 멜로디로 계속 삼천원을 주입시키는 CF 있더구만.

로시니는 실러의 사극을 바탕으로 이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로시니답지 않게 작곡기간이 무려(!) 6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대작이다. 5시간의 공연시간이 소요되고 로시니 이후 세대의 작곡가들이 작곡한 수많은 명작 오페라의 빛에 가려 전곡 상연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 이 곡의 서곡만이 유명하고 자주 연주될 뿐이다.

전설의 영웅 빌헬름 텔의 동상. 세계를 움직인 3대 사과가 빌헬름 텔의 사과, 아이작 뉴턴의 사과, 그리고 또 하나가 뭐였지?


오늘의 주인공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 아주 훌륭하고 힘찬 연주이다. 전개부의 잔잔하고 슬픈 멜로디는 민중의 저항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역동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스위스 기병의 행진에선 억압에 항거하는 민중의 저항이세상을 뒤바꾸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오페라에 대해서 검색한 여러 자료를 가지고 이 오페라의 줄거리, 배경 등등을 복사해서 갖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는 짓거리로 사료된다. 늘 이야기하지만 있잖아. 내 블로그에 와서 너무 의존적인 태도는 버리시길 바란다. 윌리엄 텔이란 오페라, 오페라의 줄거리, 배경 등등이 궁금한 분들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란다.

한 편의 유쾌한 희극 같은 인생을 살다간 이태리 오페라의 거장, 조아키노 로시니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보겠다.

상팔자 중의 상팔자

로시니의 동상. 살아생전 이 동상을 만든다고 했을 때 로시니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 글의 본문에 나온다. 하여튼 로시니는 참 인생 즐겁게 살다간 사람만은 틀림없다.

어떤 사람이 가장 팔자가 좋은 사람입니까? 혹은 어떤 사람이부럽다 못해재수없는 사람입니까? 라는 질문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던진다면? 아마도 수 십, 수 백 가지 유형의 대답이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대답을 대략 이 정도로 종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고 싶은 일을 맘대로 하면서 그만 둘 때 그만 두고 돈 걱정 전혀 없이 오래 살다 간 천재’

과학, 음악, 미술, 문학을 비롯한 연구, 창작이란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일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고통이 따른다. 하나의 일을 성사시킬 땐 때론 그 고통과 스릴을 즐기는, 그래서 자신에게 고통과 긴장감을 주는 메조키스트가 되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니, 때론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 서양 중세음악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수많은 작곡가, 연주자들의 인생 역시 천재적 능력을 타고난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끝없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이들은 그 고통 속에서 때론 슬퍼하고 때론 좌절하고 때론 희열을 느끼며 그렇게 처절하게 사는 동안 숱하게 많은 명작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예술은 잔인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가?

베를리오즈의 예를 들어본다. 베를리오즈라는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도록 한 초대형 히트작인 환상교향곡은 짝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버림받은 베를리오즈의 처절함 속에서 나온 걸작이었다. 만일 베를리오즈가 짝사랑한 그 여인이 끝없는 구애를 펼쳤던 베를리오즈에게 어느 순간에 정신줄을 놓고 자신의 마음을 허락했다면 환상교향곡이란 걸작도, 베를리오즈라는 위대한 작곡가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의 국민할매 김태원옹께서 남긴 유명한 말도 있다. 좋은 가사를 쓰기 위해선 무조건 여자에게 채여야 한다고. 여자를 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가사, 심금을 울리는 가사를 쓸 수 없다고. 이 대목에서 나도 김태원옹의 명언에 한 마디 거들고 싶다. 좋은 블로그를 만들기 위해선 무조건 여자에게 채여야 한다. 여자를 차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좋은 블로그, 심금을 울리는 블로그를 만들 수 없다. -_-

예술, 창작이란 이처럼 한 인간의 잔인한 삶을 먹고 자란다. 즉, 창작가의 삶은 맨 위에 언급한 것처럼 팔자 좋은 사람의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클래식 음악 작곡가 중 극히 예외적으로 아주 팔자가 좋은 삶을 살다간 사람이 있다. 멘델스존? 멘델스존도 엄친아였고 살아생전 모든 영광을 다 누렸지만 40이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시벨리우스? 국민적 영웅이었고 그 역시 온갖 영광을 다 누렸지만 창작의 고통은 꽤 느꼈던 사람이다. 멘델스존, 시벨리우스보다 더더욱 팔자 좋게 한 평생을 그저 즐기듯이, 하고 싶을 때 하고 그만 두고 싶을 때 그만 두고 돈 걱정도 없이, 업무의 스트레스도 없이, 오래오래 살다간 사람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상징인 조아키노 로시니이다.


음악, 돈, 음식이 있어 즐거웠던 인생

말년이 되어 더더욱 뚱뚱해진로시니. 로시니는 작곡활동을 그만 둔 후 프랑스에 정착하였고 그토록 먹거리를 좋아하던 그는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미식 연구가가 된다. 근데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모습을 나폴레옹의 코스프레?

로시니가 얼마나 천재적인 인물이었는지, 게다가 얼마나 게으르고 낙천적인 인물이었는지는 너무 유명하다. 이를테면 그의 작곡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6주 전에 오페라 작곡 의뢰를 받으면 구상이란 명목으로 4주간 팽팽 논다. 5주차에 아리아, 중창을 쓰고 6주차에 오케스트라 편곡까지 끝마친다. 그리고 부리나케 오페라 극장에 대본을 갖다 주면 그제서야 오페라 가수들이 리허설을 하는 식이다. 이처럼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고 속성으로 작곡을 한 로시니는 아주 게으르고 대책없이 낙천적인 성격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로시니는 먹는 걸 너무 좋아했는데(말년의 사진을 보라) 그가 38세의 한창 나이에 작곡을 완전히 그만 두고 은퇴한 후엔 미식가를 위한 요리연구서적을 집필할 정도였다. 또한 로시니는 유머감각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이탈리아에서 전국민적인 영웅이기도 했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밀라노에 동상을 세운다는 이야기를 듣자 로시니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차라리 그 돈 나를 주지. 하루 종일 서있을 수 있는데…’

이처럼 로시니는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창작열을 불태우면서 끝없이 고뇌하며 수정을 반복하는 베토벤 류의 천재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늘 낙천적이었고 게을렀으며 대단한 미식가임과 동시에 천재적인 재능까지 타고난 사람이었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에 이탈리아 페사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모두 음악가였고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분인지 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14세에 첫 오페라 작품을 남겼다. 어린 시절 음악학교를 다녔으나 자유분방하고 게으른 성격 때문에 학교에 쉽게 적응을 하진 못하였으나 학생들 중 음악에 대한 재능은 발군이었다.

로시니가 작곡가로 인정받은 첫 번째 계기는 그의 나이 18세에 오페라 ‘결혼 어음’을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베니스에서 ‘결혼 어음’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로시니는 이후 많은 오페라를 작곡하며 이탈리아 전역에 그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이후 ‘탄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발표하며 작곡가로서 절정을 맞게 되며 그의 인기는 전 유럽을 통틀어 최고였으며 독일의 베토벤을 능가할만큼의 인기를 누리게 된다. 또한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등 당대를 주름잡던 작곡가들과 친분도 깊었고 그의 작품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적과 흑’의 작가로 유명한 스탕달은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기도 했다. 스탕달은 로시니의 전기를 집필하였는데 ‘나폴레옹의 별이 지자 유럽에서 새롭게 떠오른 별’이라며 극찬하였다. 여기에서 스탕달이 어떤 인물인지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첨언하자면 스탕달은 한때 나폴레옹의 부관이었던 인물이다. 나폴레옹의 부관이었던 인물이 로시니를 나폴레옹과 동격으로 취급할 정도면 얼마나 로시니를 추종한 신봉자였는지 알 수 있다.

20년간 40편의 오페라를 작곡하며 창작열을 불태웠던 로시니는 37세의 나이에 마지막 작품 ‘윌리엄 텔’을 남기고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의 이유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워낙 먹는 걸 좋아하는 로시니가 본격적으로 식신이 되고자 은퇴했다는 설, 그리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설은 그의 오페라에 적합한 가수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은퇴 후 볼로냐 음악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며 교육자로 살다가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게 되는데 바로 요리를 배우며 요리서적을 집필하는 것이었다. 로시니는 대단한 미식가였고 항상 맛있는 음식을 탐닉하였는데 자신이 먹을 맛있는 요리를 먹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요리를 배우고 요리서적까지 집필하게 된 것이다. 훗날 요리 연구가들은 로시니의 업적을 기려 '조아치노 로시니 미식 국제 경연대회’라는 것까지 만들어 개최하고 있다. 음악가로 한 평생을 살았지만 요리사들에게도 존경 받으며 그의 이름을 본 딴 요리 경연대회까지 있다는 사실. 이쯤되면 이 사람의 인생이란 참으로 상팔자 중의 상팔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송로버섯. 이것만 보면 로시니가 환장했다. 로시니는 뱃놀이를 가서 송로버섯을 채운 칠면조요리를 싸갔는데 실수로 물에 빠지자 펑펑 울었다는 거짓말 같은 전설도 있다. 가격은 킬로그램당 250만원이라나? -_-;

로시니의 인생을 종합해보면 어린 시절엔 아버지의 투옥으로 생활고를 겪는 잠깐의 어려움도 물론 있었지만 18세부터 작곡가로 크게 성공하며 전국적인, 아니 전 유럽의 최고 스타가 되며 많은 돈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 게다가 선천적으로 낙천적이면서 게을러터진 성격에 돈, 인기,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맛있는 음식들이 지천에 있었으니 그는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맘껏 할 수 있고 그만두고 싶을 땐 돈 걱정이 없으니 맘껏 그만 둘 수도 있었고 게을러 터졌다고 욕할 사람도 없고 욕하기는커녕 전 유럽 최고의 슈퍼스타로 국민적 존경까지 한 몸에 받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로시니였다.

76세까지 하고 싶은 것 맘대로 하고 즐기고 싶은 만큼 즐기면서도 국민적 존경까지 한 몸에 받았던 로시니는 1868년 11월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처음엔 쇼팽이 쉬고 있는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887년에 이탈리아에 유해가 안치된다. 그가 쉬고 있는 곳은 피렌체의 성 십자가 바실리카.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라파엘로, 미켈란젤리 등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지성들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로시니가 이처럼 작곡가로서 크나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을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로시니가 철저히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였고 대중의 취향과 희망사항을 정확히 감지하여 그 시대에 걸맞는 작품을 썼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의 시대상황이다. 로시니가 활약하던 시절의 유럽사회는 나폴레옹의 깽판으로 어지러웠던 시절을 보낸 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고 보수와 안정을 원하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 가장 큰 활약을 했던 작곡가는 베토벤이었는데 베토벤 음악 특유의 처절한 감정이입과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에 대중들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보수, 안정을 바라는 대중들에게 좀 더 화사하고 밝은, 편안한 로시니의 음악이 확실히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시니가 당대에 펼쳤던 활약상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로시니가 남긴 40편의 오페라 작품 중 현재까지 연주되고 많은 음반으로 남아있는 곡은 4-5편에 불과하다. 천재적 재능이 있었기에 일필휘지로 숨막히게 속성으로 다작을 했지만 그의 작품들 중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은 몇 안 된다는 것이다. 헛점도 많고 이런저런 오류도 많았던 그의 작품들이 그 당시엔 로시니라는 이름값때문에라도 그 헛점과 오류가 묻혀 버릴 수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작품 중 시공을 초월한 예술적 가치를 부여할만한 것은 거의 없다는 것. 이는 노력하지 않았던 게으른 천재의 분명한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세월이 흐르고 나면 고난과 좌절, 피나는 노력 끝에 완성한 것들만이 빛을 보게 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고금의 진리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ps: 내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다. IQ가 158로 전교 탑이었으며 늘 전교에서 2~5등 사이를 왔다갔다 했던 친구였다. 이놈 역시 조금만 공부를 하면 전교 1등이야 따논 당상이었는데 게을러 터져서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2등을 했던 놈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을 다닐 때 숱하게 많은 시절을 이놈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어느 날은 술자리에서 이런 이야길 하더라.

‘난 고등학교 때 공부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어떡하냐? 공부는 안 했지만 시험을 보면 아는 문제가 나오는데 일부러 틀리게 쓸 수 없잖냐. 그래서 아는 문제만 답안지에 적었다. 그래서 난 2등만 했다’

이런 재수없는 새끼…-_-+
설마하니 이렇게 재수없는 소릴 해대는 놈이 이 세상에 실존하는지 궁금하신가? 진짜로 그랬다.

로시니의 글을 쓰면서 계속 그 놈이 생각났다. -_-+


클라우디오 아바도-LSO의 1978년 연주로감상하겠다. -_-+


Claudio Abbado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녹음: 1978 Stereo, Analog
장소: unknown

Posted by snip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