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SAËNS: Violin Concerto No. 3 in B minor op. 61
바이올린, 첼로 협주곡 2010. 12. 14. 21:52 |정중동(靜中動)의 연주, 가장 지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기억되는 나단 밀스타인. 그의 연주는 언제나 한 올의 흔들림도 없는 맑고 깨끗함, 그리고 넘치지 않는 중용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SAINT-SAËNS: Violin Concerto No. 3 in B minor op. 61
생상스가 남긴 바이올린을 위한 연주곡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중 바이올린 협주곡이 세 곡이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3번 협주곡 외엔 존재감이 없다. 사실 바이올린 협주곡 3번도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에 비해선 많이 존재감이 없는 편인데 그래도 생상스가 남긴 바이올린 협주곡이 이런 곡도 있구나 하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 올리게 되었다.
딱 들어보면 전형적인 19세기 낭만주의 바이올린 협주곡임을 느낄 수 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과도 큰 차별성이 있지도 않는 것 같고 작곡가 생상스만의 번뜩이는 특징, 천재성을 느끼고 싶다면 차라리 무도의 춤에서의 바이올린 독주, 아니면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가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둘 만한 정보는 1880년에 작곡되었고 당대의 타짜 중의 한 명인 파블로 사라사테에게 헌정되었다는 것. 이 역시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와 같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세기의 명 바이올리니스트 나단 밀스타인이 남긴 생상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을 그리고 다음 포스트에서는 그가 남긴 세계 최초의 LP인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을 올릴 예정이다. 나단 밀스타인이란 이름이 생소하거나 이름 정도만 알고 지냈던 분들은 유익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나단 밀스타인-시간이 흐를수록 빛났던 미친 존재감
밀스타인은 아주 오랫동안 현역으로 활동했다.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밀스타인이야말로 강자 중의 최강자였다.
언젠가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미친 존재감이란 말이 있다. 주연급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진 못하지만, 그만한 배역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존재감을 갖고 있는 조연을 미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1인자의 그늘에 가려 2, 3인자로 취급 받지만 가끔은 1인자보다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며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미친 존재감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을 또 하나 찾는다면 바로 오래오래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클래식 음악을 빛낸 숱한 장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미친 존재감을 빛낸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내 맘대로 꼽는다면 피아니스트 중엔 빌헬름 캠프(Wilhelm Kempff)가 있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빌헬름 박하우스만큼의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했지만 그 역시 당대에 오랫동안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 오늘 이야기하는 나단 밀스타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재의 홍수시대라 할만한 20세기 초에 태어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의 빛에 가려 있었지만 그만의 영역을 확실히 지켰던 사람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오~래, 아주 오~래 롱런을 했다는 것이다.
오늘은 오랫동안 미뤄왔던 20세기 바이올린의 잊을 수 없는 거장 나단 밀스타인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이 사람. 알면 알수록, 그의 연주를 들으면 들을수록 마법처럼 빠져드는 진한 매력이 있지만 그는 출생부터 단독 원샷을 받으며 살기엔 뭔가 아다리가 맞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많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선 그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명인으로 지금도 기억한다.
밀스타인은 1903년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태인 상인이었고 그의 집안은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 등에 비해 늦은 나이인 7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오데사의 유태인 출신이라는 것. 오데사라는 곳은 20세기 클래식 음악을 쥐락펴락했던 내로라하는 거장들이 태어난 보고(寶庫)와 같은 곳인데 대표적으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에밀 길렐스, 슈라 체르카스키가 이 곳에서 태어났다. 또 하나, 그가 유태인이란 것. 오이스트라흐, 길렐스도 유태인이다. 그렇다면 오데사 출신의 유태인 바이올리니스트로 맨 처음 꼽을 수 있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아마 십중팔구는 오이스트라흐를 꼽을 것이다. 밀스타인은 5년 후배인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고장에서 같은 유태인으로 태어났기에 출생부터 단독 원샷을 받기엔 2%가 부족했다.
표트르 스톨야르스키라는 스승에게서 7세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스톨야르스키의 소개로 또 하나의 대단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하이페츠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러시아 바이올리니즘의 거장 레오폴드 아우어였다. 아우어의 초청으로 상뜨 페떼르부르크에 있는 클래스에서 쟁쟁한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지만 사실 그가 아우어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순 없었다. 너무도 뛰어난 학생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돋보이기 위해 치열하게 연습해야만 했고 아우어는 그 뛰어난 학생들이 있기에 더욱 명성이 빛날 뿐이었다. 또한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아우어는 미국으로 망명했으니 밀스타인이 아우어에게 배운 것은 그다지 많을 수가 없었다. 하이페츠나 혹은 메뉴인, 리치 등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만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밀스타인의 일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단,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였던 글라주노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글라주노프의 지휘로 연주했다는 일화 정도가 전해질 뿐이다. 어린 시절부터 믿을 수 없는 신동의 전설로 점철된 여타 연주자들에 비해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는 밀스타인. 이처럼 조용하고 많지 않은 에피소드는 그가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망명, 그리고 성공시대
왼쪽이 밀스타인, 가운데의 거한은 첼리스트 그레고르 피아티고르스키, 오른쪽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이다. 셋은 모두 러시아 태생이고 절친이었으며 미쿡에 망명하여 본격적인 성공시대를 열었다.
밀스타인의 연주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동반자를 하나 꼽는다면 단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이다. 두 사람은 1921년부터 러시아 전역을 돌며 실내악 연주회를 가졌는데 "children of the revolution"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꽤 활발하게 활동했고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다녔다. 밀스타인 음악인생에서 처음으로 대외활동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 시기에 이미 소련을 떠나 서방세계로 망명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체제 하의 조국에 예술가로서의 자유로운 활동에 회의를 느낀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1925년 연주여행을 떠났고 오랜 세월 동안 조국 러시아에 돌아오지 못했다. 호로비츠는 미국 망명 후 6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80세가 넘어서야 러시아를 방문할 수 있었지만 밀스타인은 한 번도 러시아를 찾지 못했다.
절친인 두 사람이 처음으로 미쿡땅을 밟았을 때의 반응 또한 천양지차였다. 호로비츠는 1928년 토머스 비참 영감이 이끄는 뉴욕 필과 협연하며(레퍼토리는 그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충격과 공포의 전설적인 무대를 선보인 반면 밀스타인은 그저 조용히, 너무도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알려나갔다.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이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데뷔 무대를 가졌고 훗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뉴욕에 정착하였다. 이후 유럽 등지를 순회공연 하였으나 정작 조국 러시아는 가지 못했다.
밀스타인의 음악인생을 쭉 살펴보면 그의 절친이었던 호로비츠, 혹은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를 호령했던 바이올리니스트인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 심지어는 까마득한 후배였던 레오니드 코간만큼 드라마틱하고 놀라울 에피소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두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밀스타인의 이름을 빛내는 특징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첫째, 그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전혀 기량이 쇠퇴하지 않고 연주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무려 82세의 나이까지 녹음활동을 했고 83세의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팔을 다쳐서 연주활동을 그만 둘 때까지 너무도 완벽한 기교를 선보였다는 것은 놀라울 뿐이다. 특히 바흐의 ‘샤콘느’의 연주에 있어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주가 바로 밀스타인의 연주인데 80이 넘어서까지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했다는 건 경이롭다고 아니할 수 없다. ‘샤콘느’ 뿐만 아니라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 역시 80이 넘어서 녹음하였다 그 어렵고 현란한 기교를 자랑하는 곡을 80이 넘어서 어찌 연주할 수 있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70이 갓 넘은 나이에 은퇴하고 15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난 야사 하이페츠, 불의의 사고로 6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 비해 밀스타인은 훨씬 오랜 세월 동안 활을 잡으며 완벽한 기교를 잃지 않았다.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법칙을 적용한다면 밀스타인이야말로 진정한 강자였을 것이다. 비록 살아 생전의 명성이야 하이페츠, 오이스트라흐에 비해 덜했다 할지라도.
밀스타인을 빛낸 또 하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그의 천재성이다. 뭐, 내 블로그에 오랜 동안 찾아오셔서 많은 글을 꼼꼼히 읽어주신 분들이야 워낙 많은 천재의 이야기를 봤기에 놀라울 일도 아니겠지만 밀스타인 역시 진짜 천재 중의 하나였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7세에 바이올린의 모든 테크닉을 완벽하게 마스터했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83세가 되어서야 팔 부상으로 은퇴했던 밀스타인은 이후 5년을 더 살았고 1992년, 8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오로지 검은 먹물 하나만으로 때론 가늘고 길게, 때론 힘차고 묵직하게 붓으로 표현하는 수묵화. 수묵화에서 가장 어려운 표현은 바로 여백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다. 아무 의미 없이 빈 것 같지만 결코 빈 공간으로 채워선 안될 그 곳은 많은 물감을 들여 빽빽하게 채색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첫눈에 화려함을 찾아보긴 힘들지만, 휘황찬란한 색채의 조합에 압도되진 않지만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오묘한 매력을 가진 수묵화. 거기엔 바로 여백까지도 계산된 치밀함과 그 치밀함 속에서 빛나는 여백의 묘미가 빛나고 있다.
20세기를 살다간 또 하나의 명인 나단 밀스타인. 그의 음악인생은 야사 하이페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등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바이올린의 스타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만큼의 화려함은 없었다. 하지만 최고의 실력자였던 프리츠 크라이슬러, 야사 하이페츠 역시살아생전 밀스타인을 극찬하였고화려하지 않기에 누구나 쉽게 할 것 같지만 실상 가장 어려운 여백의 미를 뽐내며 오랜 시간 동안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알고 보면 그야말로 가장 화려하고 완벽한 경지에 다다른 바이올리니스트였다고.
밀스타인이 남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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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스타인은 작곡, 편곡에도 관심이 많았다. 많은 바이올린 협주곡의 카텐짜를 작곡하기도 했으며위 동영상에서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원곡도 '파가니니아나'라는 이름으로 편곡하여 연주하였다.
밀스타인은 꽤 다양한 레퍼토리를 다루며 녹음활동을 했지만 그다지 많은 음반을 남기진 않았다. 코렐리, 비발디, 바흐부터 현대 작곡가의 곡까지 매우 다양한 레퍼토리를 녹음했으나 음반수도 많지 않고 전집 녹음을 남긴 것은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파르티타 뿐이다. 의외로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았던 것은 그의 완벽한 성격과 스튜디오 녹음을 싫어했던 것에 이유가 있다.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밀스타인과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되는 오이스트라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전집 녹음을 남겼을까? 무수히 많은 음반을 남겼던 오이스트라흐 역시 전집 녹음은 믿어지지 않게 딱 하나뿐이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PHILIPS) 뿐이다. 이거 알고 보면 좀 아이러니컬하다.
밀스타인의 연주를 들어보면 우선 정말이지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러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로 같은 곡을 비교감상하며 들어봤을 때 밀스타인만큼 깨끗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느낌의 연주를 찾아보긴 힘들다. 오이스트라흐가 풍부한 감성과 힘찬 느낌의 연주이고 하이페츠가 온몸의 털을 빳빳하게 세우는 긴장감을 주는 연주라면 밀스타인은 그 중간에서 중용을 지키며 깨끗하고 청량감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그래서 소품, 협주곡을 비롯한 바이올린 연주곡을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밀스타인의 음반을 처음 접할 것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다. 밀스타인의 연주를 처음 접한 다음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면 정경화, 무터, 그리고 오이스트라흐, 코간, 하이페츠, 그 다음 시게티의 연주를 들어볼 것을 권한다. 이처럼 깨끗하고 중용을 지키는 연주는 앞서 언급한 바흐의 ‘샤콘느’에서도 잘 느낄 수 있는데 보통 이 곡의 최고로 꼽는 연주가 헨릭 쉐링, 그리고 밀스타인이다. 내 블로그에서도 쉐링, 밀스타인, 하이페츠, 시게티의 연주를 올려놨는데 내가 듣기엔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듯한 풍부한 감성을 표현한 연주로 단연 밀스타인의 연주를 꼽는다.
밀스타인은 깨질 수 없는 기록도 하나 가지고 있다. 1945년 브루노 발터의 뉴욕 필과 협연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은 세계 최초의 LP(twelve-inch 33 rpm vinyl records)였다.
1992년에 발매된 Original Capitol 음반인 'The art of Nathan Milstein'.1992년 그의 서거 기념으로 발매된 6CD음반이다. 밀스타인에 관심있는 팬들이라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여러 레퍼토리를 감상할 수 있다.
대규모의 협주곡보다는 소품, 실내악 등을 더 많이 연주했다. 젊은 시절부터 호로비츠와 짝을 이루며 실내악 연주를 많이 했고(호로비츠가 밀스타인 외에 바이올린 소나타 반주를 해준 음반은 없다) 같은 곡을 여러 번 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 파르티타를 수 회에 걸쳐서 녹음했고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녹음하였다. 이른바 4대 바이올린 협주곡이라 불리는 이들 곡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도 밀스타인의 연주는 연주 자체의 훌륭함이나 음질에서도 좋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하나만 고른다면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꼭 한 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Nathan Milstein (Violin)
Anatole Fistoulari (conductor)
Philharmonia Orchestra
녹음: 1963/06/03-04 Stereo, Analog
장소: No. 1 Studio, Abbey Road, London
전악장 연속재생
1. Allegro non troppo
2. Andantino quasi allegretto
3. Molto moderato e maestoso - Allegro non tro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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