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있는 하차투리안 기념관의 석상. 아람 하차투리안은 아르메니아 태생으로 구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며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도 재직했다.

KHACHATURIAN: Masquerade Suite

구 소련에서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와 더불어 3대 빨갱이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던 아람 하차투리안. 그에 대한 소개는 예전에 그가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소개할 때 간략하게 한 적이 있다. 하차투리안 음악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직선적이고 강렬한, 그리고 경쾌함이다. 그의 대표곡인 가야네의 발레 모음곡(Gayane Ballet Suite), 또는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등에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직선적이고 강렬한 음악만을 만든 것엔 당시 하차투리안이 살았던 소련의 사회적 분위기, 예술가에 대한 탄압정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스탈린의 압제 속에서 서방세계로의 망명을 택하지 않고 조국에 남아야 했던 당시의 작곡가들은 체제의 요구에 의한 곡만을 작곡할 수 있었으며 그 음악들이란 것이 하나같이 선동적이고 단순명료해야만 했다.

하차투리안의 음악이 다른 두 명의 빨갱이 작곡가와 차별화되는 특징이 있다면 아무래도 좀 더 듣기 편한, 쉬운 음악이라는 점이다. 쇼스타코비츠의 음악은 듣기 어렵기로 정평이 나있고 프로코피예프 역시 만만치 않다. 또 하나의 특징은 두 사람의 음악에 비해 좀 더 직선적이고 선동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것이다. 하차투리안은 한때 부르주아 풍의 음악을 많이 작곡한다는 이유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기소되어 공직에서 물러난 전력도 있었고 쇼스타코비치 못지 않게 많은 탄압을 받은 작곡가였다. 그러나 탄압에 대한 대처방법은 쇼스타코비치와 달랐다. 쇼스타코비치가 순수예술을 억압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던 반면 하차투리안은 상당히 고분고분했다. 그 예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이 문제가 되자 원래 작곡했던 음악 전체를 싹 바꾸었고 인민예술가의 칭호와 레닌상 수여, 그리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이와 같은 경직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느낌의 서방세계 음악들, 특히 독일-오스트리아 풍의 왈츠, 째즈 같은 것들은 퇴폐적 낭만으로 가득한 음악으로 낙인 찍혀 당국의 심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왈츠라는 같은 장르의 음악을 들어봐도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왈츠와 스트라우스 부자의 왈츠와는 완전 딴판임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하차투리안의 가면무도회 모음곡 역시 마찬가지다.

가면무도회 모음곡은 5곡의 모음곡 형태로 되어 있다. 이 곡은 러시아 낭만주의 문학의 대가인 미하일 레르몬토프가 쓴 동명의 희곡의 무대상연용으로 만들어졌다. 1841년에 가면무도회가 무대에서 상연된 후 1844년에 5곡만을 따로 발췌하여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으로 다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극의 내용은 매우 신랄하고 비극적이다.


5곡의 모음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제1곡인 왈츠이다. 왈츠에 대해서 이야길 해보자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왈츠라는 음악을 떠올릴 때 아마도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의 왈츠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황제 왈츠(Kaiser-Walzer),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An der schönen blauen Donau) 등의 아름다운 선율이 가깝게는 점심시간에 구내식당 등에서, 멀게는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세계인의 명곡이다. 그리고 이 왈츠를 세계인의 음악으로 만든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 중 왈츠(사실 클래식 음악의 범주에 들어가는 어떤 음악이든 마찬가지겠지만)라는 장르는 독일-오스트리아가 바로 본령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오스트리아의 빈(wien) 풍 왈츠가 본령이겠지만 세상엔 꼭 빈 풍의 왈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의 작곡가들도 왈츠를 작곡했다. 그리고 이들이 작곡한 왈츠는 독일-오스트리아 계열의 왈츠와는 아주 색다른 느낌이다. 스트라우스 부자로 대표되는 빈 풍의 왈츠가 은은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듣기 딱 좋은 멜로디라면 러시아 작곡가들의 왈츠는 좀 더 역동적이고 큰 스케일을 자랑한다. 뭐랄까. 오스트리아의 왈츠가 아기자기한 동작의 영춘권이라면 러시아의 왈츠는 큼지막하게 원을 그리며 화려함을 강조한 소림권이라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일본의 아사다 마오가 하차투리안의 가면무도회 중 ‘왈츠’를 테마곡으로 쓰면서 역동적인 면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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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이 보기에 늘 똑같은 점프와 스케이팅으로 이루어진 동작들 같지만 이 음악에 맞춰 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니 훨씬 화려하고 힘차 보인다. 중간에 자빠지지만 않았다면 너무 완벽한 연기였다.

처음엔 이 곡을 소개하면서 왈츠만을 올리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나머지 4곡도 너무 아름다워 같이 올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였다. 제1곡인 왈츠는 빈 풍의 왈츠와는 전혀 색다른 면을 느낄 수 있다. 화려하고 힘차지만 짙은 슬픔을 깔고 있다. 2곡의 제목은 녹턴이다. 서정적인 면을 많이 부각시켰다. 3곡의 제목은 마주르카. 다시금 무도회장의 화려한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하지만 1곡 왈츠와는 또 다른, 화려한 느낌을 많이 부각시키고 있다. 4곡 로망스에서 다시 분위기를 전환시키며 우수에 잠긴 듯한 분위기를 살리고 5곡 갤롭은 가볍고 경쾌한 재즈모음곡 같은 분위기를 이끌며 막을 내리고 있다.

생각보다 많은 음반이 있는 곡은 아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음반으로는 소련의 명 지휘자였던 키릴 콘드라쉰이 남긴 음반이 있다. 러시아, 구소련 작곡가의 곡을 가장 잘 해석했던 지휘자 중 하나로 정평을 났던 콘드라쉰답게 때론 힘차게, 때론 서정적인 느낌을 잘 살린 명반으로 평가 받는다. 내 블로그에선 스탠리 블랙과 LSO의 음반으로 소개하겠다.


John Georgiadis (Violin)
Stanley Black (conductor)
London Symphony Orchestra
녹음: 1977 Stereo, Analog
장소: N/A

전곡 연속재생

1. Waltz

2. Nocturne

3. Mazurka

4. Romance

5. Galop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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