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천수관음보살 라흐마니노프. 그가 작곡한 곡과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과연 한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연주한 곡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RACHMANINOV: Symphonic Dances op. 45

러시아와 유럽을 넘어 미쿡에서도 순회공연을 통해 그 명성을 떨치고 있던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그는 1917년에 볼세비키 혁명이 발발하자 조국 러시아를 떠나 원치 않았던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대대로 귀족가문의 지주 출신이었고 중산층이나 즐겨 듣는 서구 음악의 작곡가였기에 빨갱이들의 눈에는 혁명의 과업을 위해 반드시 처형해야 할 1순위 인물 중 하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북유럽 국가들의 초청을 받자 가족들과 함께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황급히 열차에 올랐고 핀란드를 거쳐 스웨덴 국경을 넘어서는 고단한 피난생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자유와 기회의 땅인 미쿡에 정착하게 된다.

미쿡에 정착한 라흐마니노프. 꽤나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작곡가, 연주자, 게다가 지휘자로서의 능력 또한 당대 최고의 실력자였던 그는 그 놈의 돈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작곡과 지휘를 중단하고 연주자로서 미국 전역을 누비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라흐마니노프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알고 보면 참 아이러니컬하다. 먹고 살기 위해 세 가지 재능 중 두 가지를 포기하고 한가지에만 매달렸지만 정작 그에게 안정된 수입과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은 한 가지, 피아니스트로서의 활약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라흐마니노프의 살아생전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거야말로 rare item이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피아노 제작사 슈타인웨이(steinway)는 라흐마니노프의 연주회를 후원했고 그가 슈타인웨이로 연주함으로써 엄청난 광고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또한 많은 돈을 벌게 해준 대신 엄청난 스케줄로, 마치 마른 오징어에서 엑기스를 뽑듯이 라흐마니노프를 혹사시켰던 것도 유명한 일화이다.

미쿡에 정착하여 피아니스트로서 10년을 살았던 라흐마니노프. 그는 러시아를 떠나 망명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무려 10년 가까이 작곡을 할 수 없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작곡을 못했던 것도 있겠지만 정작 중요한 이유는 조국을 그리워하는 향수병 때문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1926년부터 다시 작곡을 재개, 피아노 협주곡 4번, 1931년에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of Corelli)을 작곡하였다.

1934년부터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본격적으로 작곡활동을 재개하였는데 이때 연달아 내놓은 작품들이 1934년에 발표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1935년에 발표한 교향곡 3번,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교향적 무곡(Symphonic Dances)을 1940년에 발표하였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 세 곡을 연달아 발표한 라흐마니노프는 1942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고(흑색종, malignant melanoma)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도 1943년 마지막 순회공연을 단행한다. 1943년 2월 17일, 테네시 대학에서 마지막 무대를 가진 라흐마니노프는 극도로 통증이 심해지자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비버리힐스의 자택으로 돌아왔고 3월 28일, 70세의 생일을 나흘 앞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유언 또한 참 슬픈 걸작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손, 잘 있거라, 가여운 나의 손이여'

13도를 한 번에 칠 수 있었던 거대한 손. 그 거대한 농구선수 같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렇게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손은 수많은 연주회를 통해 기쁨과 감동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휘봉을 들면 마법에 빠진 것처럼 아름다운 관현악을 지휘했고 수많은 곡을 작곡하여 후세의 사람들에게도 훌륭한 문화유산을 남길 수 있었던 거대한 손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비정상적으로 큰 손은 마르팡증후군(Marfan syndrome)이란 병때문이었다. 어쨌든 아름다운 곡을 썼던 라흐마니노프의 손과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는 제시카의 목은 후대에게 물려줘야 할 훌륭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런데 1930년 이후 생의 마지막에 발표한 세 작품(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교향적 무곡)에서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파-미-파-레-미-도-레로 이어지는 레퀴엠 중 ‘진노의 날(dies irae)’의 멜로디를 변형시켜 삽입한 것이다. 오늘 소개하는 교향적 무곡에서는 3악장에 등장한다. 이들 작품뿐만이 아니다. 아마 귀가 밝은 분들은 느꼈을 텐데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의 5악장에서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댕~댕~ 은은하게 울려 퍼진 후부터 폭주하는 멜로디 역시 이것이다. 또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인 죽음의 무도(Totentanz),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에서도 등장하고 오이겐 이자이(Eugene YSAŸE)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의 1악장 ‘Obsession’에서도 이 디에스 이레가 반복된다.

라흐마니노프의 생애 마지막 세 작품에서 이처럼 디에스 이레가 반복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마도 라흐마니노프는 하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 신의 옆에서 그 큰 손으로 피아노 연주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교향적 무곡의 작곡에 몰두, 그의 마지막 작품답게 약 3개월간에 걸쳐 사력을 다하여 완성하였다. 1941년 1월 3일 필라델피아 필의 전설 유진 오먼디의 지휘하에 초연되었다. 곡의 느낌은 1악장의 처음부터 매우 씩씩한 행진곡풍으로 돌진하고 있다. 특히 이 곡의 1악장은 한때 라흐마니노프를 우울증에 빠지게 했던 저주받은 곡, 교향곡 1번의 1악장을 많이 갖다 썼다. 알고 보면 이 사람. 꽤 곤조 있다. 폐기 처분하라고 그렇게 난리 친 곡을 기어이 인정받고 싶어 했으니. 전체적인 분위기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공통적인 특징이 그대로 살아있다. 진중하면서도 음산한 분위기를 최대한 끌어올리다 화려한 피날레를 선보인다. 생의 마지막 작품답게 남다른 비장함이 묻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보다는 말 그대로 무곡의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씩씩하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전곡과 유명한 관현악곡이 수록된 음반이다. 아쉬케나지 특유의 음색을 좋아한다면 사서 들을만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베틀라노프의 음반이 더 좋은 선택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듣겠다. 아쉬케나지라는 사람은 뭐랄까. 연주자로서는 약간 본전 생각나게 하고 지휘자로는 그래도 본전은 해주는 느낌이랄까? 이 음반에 수록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과 관현악곡도 좀 그렇다. 아무래도 사람 취향따라 다르겠지만 내겐 백곰 스베틀라노프의 연주가 훨씬 후련하고 듣기 좋다.

* 환상교향곡의 5악장,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 이자이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의 1악장 등에서 똑같은 멜로디가 등장하는 것에 대해 평소에 나 역시 궁금했었다. 그 궁금증을 이번 포스트의 작성을 위한 자료조사 중 해소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허원숙 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파-미-파-레-미-도-레로 이어지는 디에스 이레의 멜로디의 글을 읽고 그 답을 찾았다. 내가 이제껏 썼던 많은 글 중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일대기는 허원숙 교수님의 홈페이지에 있는 주옥 같은 글에서 많은 참고를 하였다. 피아니스트의 생애에 관심 있는 분은 찾아가 보시길. 방대한 양의 주옥 같은 글을 읽느라 시간가는 줄 모를 것이다.

Vladimir Ashkenazy (conductor)
Concertgebouw Orchestra
녹음: 1983/1 Stereo, Digital
장소: Concertgebouw, Amsterdam

전악장 연속재생

1악장-Non allegro

2악장-Andante con moto

3악장-Lento assai - Allegro vivace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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