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하얗게, 하얗게 갇혀버린 모습. 그 누가 눈내리는 하늘과 눈쌓인 땅에서 어설픈 낭만을 찾는단 말이더냐. 근데 국토의 최동남단부산만 멀쩡하다. 국토의 최전방 부산에서 군생활하다가 동상걸렸다고 야부리치는 인간들의 정체는 뭐지?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 2 in C minor op. 18(S. Richter)

오늘. 온 세상이 하얗게 갇혀버린, 그렇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순백의 세계라는 표현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한 들뜬 낭만일 뿐인 날이다. 눈을 영어로는 SNOW, 일본어로는 유키(雪)라고 하는데 한국의 성인 남성들끼리 부르는 또 다른 표현이 있다.

하얀 악마의 똥가루

귀때기가 떨어질 것 같은 이 엄동설한에 무릎팍까지 푹푹 잠기는 눈을 치우느라 천삽 뜨고 허리펴기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백 번도 더 공감할 것이다. 눈이라는 것. 낭만의 눈빛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이런 날이면 가끔 생각나는 곡이 있다. 정녕 설명이 필요 없는 곡. 바로 라흐마니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이 곡은 내게 약간은 특별한 사연이 있다.

몇 해전. 필자는 한 겨울에 이 곡을 들으면서 밤새 고속도로 운전을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그 지리한 시간동안 난 졸린 눈을 비벼가며 몇 시간 동안 운전을 해야만 했다. 세상을 하얗게 가둬버릴 듯한 눈바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거세게 몰아치고 더 눈이 쌓이기 전에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기에 더더욱 악셀을 밟으면서. 눈꺼풀이 무거워질 땐 창문을 활짝 열고 칼날처럼 얼굴에 부딪히는 찬바람을 맞으며 어둠 속을 질주하는 그 시간 동안 필자는 차 속에서 라흐마니피아노 협주곡 2번을 max volume으로 틀어놓고 있었다. 그 어둠 속의 고독을 느껴야 했던 시간 동안 필자에게 유일하게 이야기해준 벗이 바로 이 곡이었다. 그때 그 시간 동안 필자는 마치 피아니스트가 된 것처럼 피아노와 물아일체가 되어 있었고 더불어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라면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음험하게 밀려오는 1악장 도입부의 장중한 오케스트라.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운 피아노 소리는 깊은 어둠의 정적을 깨고 내 귀를 통해, 필자의 가슴으로 다가왔다. 그때 이후로 이 곡을 들을 때 마다 어둠 속에서 고속도로를 질주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 폐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던 그때의 그 감동이란…뻥 뚫린 가슴속에 거센 파도처럼 밀려와 고독의 시간과 싸우고 있던 필자에게 감동의 물결을 일으켜주었다.



어…평소 내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께서는 조금 눈치 채셨겠지만 내가 이런 식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내 몸이 닭살을 넘어 마치 한 마리 닭이 되어버릴 듯한 따위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어설프게나마 흉내 좀 내봤다. 뭘 흉내 냈느냐 하면 허세 시리즈라는 게 있는데 그걸 좀 흉내 내봤다. 허세시리즈의 대표인사로 남자는 장근석, 여자는 구혜선을 꼽는데 장근석의 허세가 좀 더 유명하다. 혹시 몰랐던 분들은 이 참에 올려놓을 테니 보시길. 난 이것 보면서 거짓말 안 보태고 30분도 넘게 정신 없이 웃었다. 장근석. 너땜에 내가 잠깐이나마 크게 웃고 살았다. 고마웠어.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클래식 음악을 듣는 행위가 지적허세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된다. 행여라도 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이 클래식 음악을 좀 듣는다고 위와같은 허세를 부리는 일은 없어야 함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다.

악마의 똥가루가 한반도의 천지를 뒤집고 있는 오늘 같은 날엔 예전의 경험도 있고 해서 이 곡이 가끔 생각나는 건 사실이다. 마치 저기 먼 곳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눈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음험한 분위기. 라흐마니노프의 이 곡은 뭐니뭐니해도 그 어둡고 음험한 낭만을 제대로 살려야 제 맛이다.

달리 설명이 필요없는 곡이고 달리 설명이 필요없는 음반 세 가지를 이미 내 블로그에서 소개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스타닌슬라프 비스로키-바르샤바 필의 연주, 그리고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앙드레 프레빈-LSO의 연주, 라흐마니노프 본인이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 연주까지 세 가지이다. 링크는 걸어놓지 않을 테니 듣고 싶은 분들은 라흐마니노프 카테고리에 들어가서 직접 들어보시길.

불멸의 명반으로는 누구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스타닌슬라프 비스로키-바르샤바 필의 음반을 꼽는다. 나도 100% 공감하긴 하지만 오늘은 또 하나의 숨겨진 명반을 소개하고자 한다. 리히터가 동독의 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레닌그라드 필과 협연한 음반이다. 이 음반은 비스로키-바르샤바 필의 DG 음반보다는 훨씬 덜 알려졌지만 이 곡을 좋아해서 몇 가지 이상으로 비교감상하는 팬들에겐 잔데를링-레닌그라드 필과 함께 한 이 음반에 더 좋은 점수를 주기도 한다. 한가지 흠이라면 음질이 너무 좋지 않다는 점인데 음질을 고려하지 않고 좀 더 사납게, 좀 더 거칠게 어둠 속의 찬바람 같은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낭만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 음반 역시 필청음반이다.

이 음반에 함께 커필링 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와 협연한 것이다. 이 연주 역시 숨겨진 명연으로 두 사람의 불꽃 튀는 대접전이 끝없이 펼쳐진다.

DG의 음반과 이런저런 비교감상 포인트를 적자니 그것 또한 이 음반을 직접 접한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음반은 음질 빼놓고는 최고의 명반 대열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명반 중의 명반이다. 그리고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가 왜 매니아들 사이에선 신처럼 추앙받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음반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지휘자 쿠르트 잔데를링도 마찬가지다. 거세게 몰아부치는 관현악의 반주는 비스로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사실 잔데를링이란 지휘자에 대해서도 설명할 거리가 아주 많은데 훗날을 기약하겠다.

*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슬픈 일도, 화날 일도 많았던 2010년.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처럼 위태롭게, 하지만 의미있게 1년을 보냈습니다.

제 블로그에 찾아오신여러분들도 2010년을 보내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복된 2011년을 맞이하시길 기원합니다.

Sviatoslav Richter (Piano)
Kurt Sanderling (conductor)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녹음: 1959 Mono
장소: Leningrad

전악장 연속재생

1. Moderato


2. Adagio sostenuto

3. Allegro scherzando


Posted by snip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