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Symphony No. 5 in C minor op. 67(E. Mravinsky)
교향곡/-베토벤 2010. 4. 19. 22:34 |철의 장막 저쪽의 전설. 신(神)이라 불리운 사나이. 그 이름 바로 에브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이다. 구 소련을 넘어 동구권 전체를 대표했던 최고의 지휘자로 레닌그라드 필을 50년간 철권통치했던 독재적 카리스마의대명사.
BEETHOVEN: Symphony No. 5 in C minor op. 67(E. Mravinsky)
내 블로그에 또 하나의 신청곡이 들어왔다. 그런데 좀 생뚱맞은 신청곡이다. 왜 생뚱맞냐고 물으면두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름인 세기의 대지휘자 에브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равинский)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이기 때문이다. 므라빈스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베토벤=므라빈스키라는 등식이 도저히 쉽게 성립되진 않을 것이다. 또한 므라빈스키가 베토벤 교향곡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가 주로 다루었던 베토벤 교향곡은 4번이었지 5번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므라빈스키가 가장 사랑했던, 최고의 음악이라고 칭송했던 교향곡이 두 곡이 있다. 바로 5번 교향곡이다. 므라빈스키는 5번 교향곡이야말로 교향곡의 전부라고 언급했는데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아니고 차이코프스키와 므라빈스키의 절친이었던 쇼스타코비치의 5번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베토벤 교향곡 5번과 므라빈스키는 쉽게 어울리기 힘든 조합이라고 생각하기에 더더욱 생뚱맞게 느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만 생뚱맞게 생각하는지 아닌지는 음악을 감상한 후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 곡의 가장 보편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베스트셀러로 인정받는 두 지휘자의 음반은 벌써 4년 전에 소개했던 적이 있다. 푸르트벵글러-베를린 필의 전시녹음과 카를로스 클라이버-빈 필의 1974년 녹음이다. 그들이 남긴 음반과도 꼭 비교해보시기 바란다. 늘 이야기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묘미는 하나의 곡을 가지고 골라 듣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며 산자와 죽은 자의 대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뭔 소리냐면 2010년을 살고 있는 명망있는 지휘자가 베토벤 교향곡을 끝내주게 지휘한다는 소릴 백날 들어봐야 1940년대 푸르트벵글러, 1970년대 클라이버와 직접 비교를 당하며 죽은 자와의 대결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당사자는 억울하겠지. 억울하지만 음악을 골라 듣는 사람은 그 묘미를 느끼려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걸.
이렇게 된 거 이번 포스팅에서는 강철의 지휘자로 반세기를 호령했던 구 소련의 전설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에 대해서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철의 장막 저쪽의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와 디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젊은 시절 모습. 둘은 절친한 친구였고 므라빈스키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초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 출세를 하고 저명인사가 되었을 때 고향에 찾아오면 금의환향한다고 한다.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은 출세를 한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따라다니는 말이기도 한데 즉, 출세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떠나 더 큰 곳에 가서 일신의 성공을 이룬 뒤 다시금 당당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오는 모습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렇게 출세한 사람과 그 집안은 그 고향의 자랑거리가 된다. 시골마을 돌아다녀보면 쉽게 볼 수 있는 현수막들 있지 않나? 장하다! 이장아들 사법시험 합격! 이렇게들 많이 써붙이지 않나.
그런데 금의환향이랄 것도 아니라 그 고장에서 태어나서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전국적으로, 아니 세계 속에 우뚝 선 거물이 되었을 때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개천에 용났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고 그야말로 그 고장의 神이라고 표현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구 소련을 대표하는, 아니 동구권의 공산국가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휘자 에브게니 므라빈스키는 바로 神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에 다름 아니었다.
므라빈스키는 1903년 상트 페테르부르트(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이후 85년간을 오로지 상트 페테르부르트(훗날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뀐다)에서만 살며 바로 이 도시의 상징, 전설,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모가 마린스키 가극장의 성악가이기도 했고 그의 집안 전체가 음악과 가까운 환경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나이 15세에 사망하였는데 그때 생계를 위해 잠깐 마린스키 가극장에서 일을 하며 배우의 꿈을 꾸기도 했다. 대학 역시 레닌그라드 대학에 들어갔는데 생물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기에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였다.
지휘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31년, 레닌그라드 오페라 극장의 부지휘자를 하면서부터였다. 이 당시의 그는 발레단의 연습코치 생활을 하며 지휘자로서 착실히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므라빈스키의 이름을 전 소련에 알리게 된 사건은 1938년, 그의 나이 35세때였다. 제 1회 전 소비에트 연방 지휘자 콩쿨(All-Union Conductors Competition)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해, 그는 꿈꿔왔던 레닌그라드 필에서 처음으로 지휘를 맡게 되고 레닌그라드 필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였다.
므라빈스키는 또한 서방세계에 진출하게 된 제1진의 그룹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냉전의 해빙무드가 조성되면서 소련에서도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뛰어난 예술가들을 서방세계에 연주여행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1진의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 바로 므라빈스키,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에밀 길렐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등이었다. 참고로 이 당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이 그룹에 속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기 포스트에 적혀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므라빈스키와 함께 하는 레닌그라드 필의 공연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충격, 그 자체였다. 진짜 러시아, 진짜 차이코프스키가 무엇인지 들려주는 그들의 연주는 카라얀 류의 빠다바른 듯한 느끼하고 매끄럽기만 한 음악에 길들여진 서방세계의 음악애호가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불멸의 카리스마, 신적 존재, 공포의 지휘자로 반세기를 호령했던 그였지만 물론 처음부터 카리스마를 선보일 수는 없었다. 이제 겨우 35세의 핏덩어리 지휘자가 취임하자 닳고 닳은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겨우 35세의 지휘자를 두고 사관생도가 음악을 배우러 왔다며 조롱하고 깔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므라빈스키는 타고난 보스, 남다른 카리스마의 화신이었다. 오케스트라 내의 파벌을 형성하던 몇몇 단원들을 일거에 제압한 후 그 후부터 단원들은 하나같이 그의 수족이 되었다. 그것도 무려 50년간이나.
단원들 사이에서 얼마나 그가 공포스러운 존재였는지에 대한 일화는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레닌그라드 필에서 활동했던 단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므라빈스키는 레닌그라드시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신적 존재에 다름 아니었고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시 전체의 커다란 행사였다. 그의 말 한마디는 법이요, 진리였으며 그가 하는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하늘 색깔이 빨간 색이라고 하면 빨간색이 되는 것이며 현정화가 라면만 먹고 육상에서 금메달 세 개를 땄다고 하면 육상선수 현정화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단원들이 연습을 하기 위해 집합하는 시간은 언제나 므라빈스키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 한 시간 전에 전원집합 완료한 뒤 므라빈스키가 도착하기 30분 전에는 튜닝을 완벽하게 마쳐야 한다. 그리고 므라빈스키가 자리에 앉아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올리면 단 한치의 오차,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완벽한 하모니가 나와야 했다. 므라빈스키와 레닌그라드 필은 바로 그런 관계였다. 이와 같은 독재적 카리스마를 두고 혹자는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경직된 풍토의 사회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한 므라빈스키 개인의 지나친 독재적 성향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에 대한 존경, 경외의 발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다른 건 몰라도 그가 해석한 러시아 작곡가의 음악, 특히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므라빈스키 이상의 것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므라빈스키가 남긴 음악
가볍게 손짓만 하며 지휘하는 므라빈스키. 그가 평생동안 가장 사랑했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의 4악장이다. 레닌그라드 필의 단원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이 곡을 완벽하게 암보했어야만 했다.
앞서 언급했지만 므라빈스키가 가장 사랑했던 음악, 그 중에서도 교향곡을 꼽는다면 두 곡을 꼽을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이다. 레닌그라드 필의 단원들은 이 두 곡에 있어서 만큼은 그야말로 잠자는 꿈속에서도 연주할 수 있을만큼 완벽한 암보를 했어야만 했다. 이처럼 므라빈스키는 러시아 출신의 작곡가, 그 중 전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와 당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며 그의 절친이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는 절대적인 바이블이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특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중 가장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는 곡이자 가장 유명한 곡인 5번 교향곡을 초연하였다. 뿐만 아니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6번, 9번, 10번을 비롯하여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첼로 협주곡 1번 등의 많은 작품을 초연하며 쇼스타코비치=므라빈스키라는 등식을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훗날 정치적인 견해차이로 쇼스타코비치와 소원한 관계가 되었으나 므라빈스키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의 악보를 보며 리허설을 준비할 만큼 그의 음악을 사랑했다.
므라빈스키의 음악 스타일은 사회주의 체제의 문화예술이 표방하는 직선적인 메시지 전달, 퇴폐적 낭만의 배척이란 점에 100% 일치한다. 그의 음악 스타일은 결코 에둘러 가는 법이 없다. 초장부터 과감하게 밀고 들어와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전형적인 인파이터 스타일이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전체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일사불란한 음을 창조하는 능력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단히 밀도있고 정확한, 그리고 직선적인 사운드. 므라빈스키에 환장하는 애호가들은 바로 이런 직선적인 멋 때문에 그의 사후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 시간에도 그의 음반들을 지르고 또 지르며 돈지랄들을 한다.
*전설의 명음반 감상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DG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6번 '비창' 감상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DG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5번감상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DG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4번 감상
므라빈스키는 스튜디오 녹음을 매우 싫어했다. 정확히 1961년까지의 음반이 스튜디오 녹음이고 그 이후의 음반은 모두 실황녹음이었던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역사적인 음반인 차이코프스키 후기 3대 교향곡(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DG)의 그 촌시런 청록색 껍데기의 음반이 1961년에 녹음되어 반세기가 지나도록 최고의 위치에서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음을 미루어 볼 때 그가 당시 이 음반을 런던에서 녹음한 선택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해야 하고 당시 므라빈스키의 바짓가랭이를 붙들고 몇 번씩이나 애원했다는 DG의 매니저를 또 얼마나 고맙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레퍼토리 또한 다양했다.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많이 녹음했고 워낙 뛰어나서 그렇지 독일 작곡가-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바그너, 브람스-등의 교향곡과 오페라 서곡 등을 많이 지휘했다. 이들 중 어떤 음악을 골라서 들어도 므라빈스키만의 색깔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므라빈스키는 음악 외에 다른 분야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고 공부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시절엔 생물학을 공부하기도 했고 외국어에도 능통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자연철학과 시문학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단, 정치와 이념에 있어선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바로 이점 때문에 절친이었던 쇼스타코비치와 단절하기도 했었다. 생활 또한 매우 절제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많은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이 만든 옛 음원들 중 음질이 괜찮은 것들만 모아서 ERATO에서 발매하고 있는 음반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꽤 괜찮은 곡들을 모아놨으니 므라빈스키에게 관심있는 팬들이라면 하나쯤 소장해도 좋을 음반이다.
1988년 1월, 그의 나이 85세가 되어서야 반 세기를 호령했던 절대적인 카리스마도 빛을 잃고야 말았다. 므라빈스키는 1988년 1월 19일, 그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망하기 전 오스트리아에서 치료를 받을 때 빈 악우협회 대표가 므라빈스키의 치료비 전액을 협회의 이름으로 지불하겠다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그는 동토의 땅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며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섰다. 체제에 순응하며 오로지 예술세계에만 천착하였기에 절친이었던 쇼스타코비치와 소원한 관계가 된 적도 있었고 그의 숨막히는 독재적인 지휘 스타일은 대화와 소통이 화두가 된 시대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의 많은 음반들은 녹음한지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확고부동한 최고의 명반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므라빈스키가 남기고 떠난 예술혼, 그 혼에서 비롯된 수많은 명연주는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숭고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강철의 거장 므라빈스키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Yevgeny Mravinsky (conductor)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녹음: 1974/09/15 Stereo, Analog
장소: Leningrad Philharmonic Large Hall
전악장 연속재생
l Allegro con b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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