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 54(D. Lipatti)
피아노 협주곡 2010. 5. 8. 18:11 |클라라 하스킬과 함께 한 리파티. 두 사람 모두 루마니아 출신이고 어릴적부터 천재 중의 천재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겸손하고 선한 성격마저도 닮았다. 둘은 서로를 무척 존경하고 아꼈는데 닮지 않았어도 좋을 슬픈 운명마저도 닮았다.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minor op. 54(D. Lipatti)
아주 오랜만에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하나 올린다. 벌써 4년 전에 마르타 아르헤리치 할매의 연주로 올린 적이 있는데 올해가 슈만이 탄생한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기념으로 오랜만에 피아노 협주곡을 감상하겠다.
슈만은 협주곡이란 분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할 때에도 독주자의 기교를 과시하는 곡은 결코 쓰지 않겠다고 작정할 정도로 그는 협주곡에서 독주자의 소리가 너무 튀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 이유로 그가 남긴 협주곡은 많지 않은데 첼로 협주곡이 한 곡 있고 바이올린 협주곡이 한 곡 있으나 이 곡은 많이 연주되지 않는 편이다. 그 외에 피아노 협주곡 형식의 서주와 알레그로 G장조(Introduction and Allegro appassionato in G major)라는 곡이 또 하나 있다.
이처럼 많지 않은 협주곡을 남긴 슈만이지만 그가 남긴 피아노 협주곡 A minor는 고금을 통해 가장 많이 연주되는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명곡이다. 여기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영화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독일영화인 vier minuten,포미닛이란 영화이다. 천재적인 피아노 솜씨를 가진 한 소녀, 하지만 교도소에 복역중인 이 문제아가 어찌어찌해서 피아노 콩쿨에 참여하게 된다는 이야긴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곡이 바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다. 그러나 이 소녀는 곡을 모두 연주하지 않고연주회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만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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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알려진 영화는 아니지만 피아노 곡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꼭 한 번쯤 볼만한 영화이다. 내가 추천하는 영화이니 챙겨보셔도 좋을 듯 하다.
눈물없인 들을 수 없는 연주, 불과 5년이란 짧은 시간동안 10장의 레코드만을 남기고 떠났지만 지금도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울리는 명연주를 남긴 거장으로 기억되는 그 이름. 디누 리파티의 연주로 감상하겠다. 또한이번 포스트에서는 리파티의 눈물나는 삶에 대해 알아보겠다. 먼저 이야기해 둘 것은 리파티는 내가 아는, 20세기의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삶을 살다간 피아니스트라는 점이다.눈물이 필요한 분들은 한 번쯤 그의 연주와 인생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디누 리파티-슬픈 운명을 타고난 신의 악기
어떤 음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작곡가가 당시에 처해있는 심리적 상황, 감정의 기복 등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 더욱 풍부한 감성으로 곡을 감상할 수 있다. 게리 올드먼 주연의 ‘불멸의 연인’이란 영화에 보면 주인공 베토벤은 작곡이란 행위에 대하여 '작곡가가 작곡 당시에 느꼈던 그 감정 그대로의 전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현재시점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정확히 일치할 순 없는 것이므로 과거를 살았던 인물에 대한 심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어쨌든 어떤 곡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내 블로그에 찾아오시는 분들께서도 바로 그와 같은 이해를 돕기 위해 어찌어찌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내 블로그까지 오셨을 것이다.
과거를 살았던 한 사람이 겪어야 했던 거칠었던 삶, 그 삶에 녹아있는 온갖 감정의 기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여 보다 더 풍부한 감성을 얻고자 하는 행위는 작곡가뿐만 아니라 연주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피아노 곡을 듣는다고 해도 다른 숱한 연주자들의 연주에 비해 클라라 하스킬이 연주하는 곡에서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숨어있는 처절함까지 함께 들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하스킬의 그 거짓말 같은 모진 인생을 알고 하스킬의 연주를 감상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편견이라고 치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음악, 연주라도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들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어차피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은 철저히 나의 주관적인 감성의 문을 활짝 열고 느껴보고자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끝없는 비상을 준비했던 한 피아니스트가 있다.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으며 15세의 나이에 이미 실력으로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당대 최고의 음악 스승들을 사사하며 작곡에까지 크나큰 두각을 나타냈으며 20세가 되어선 이미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자리를 예약해놓고 있었다. 피아니스트의 재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작곡실력도 발군이었고 지휘까지 공부하며 멀티플레이어로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이른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려온 영재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뻑증도 그에겐 없었다. 그는 늘 겸손하였고 노골적이면서 신랄한 자아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겸손한 성격 때문에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음악을 대할 때 늘 종교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자신이 신의 도구로 쓰임을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불과 33세의 너무 이른 나이에 신의 부름을 받고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세상과 작별하는 순간까지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피아노 앞에서 신의 도구가 되길 원했으며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를 살았던 피아니스트 중 가장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삶을 살았던 그 이름. 불과 33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슬픈 이름. 바로 디누 리파티(Dinu Lipatti )이다.
건강하지 못했던 완벽한 천재
어린 시절의 리파티. 좋은 부모밑에서 태어나 좋은 스승밑에서 음악을 배우며 천재 음악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적부터 건강이 매우 좋지 않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디누 리파티는 20세기의 피아니스트 중 가장 슬픈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지금부터 진짜 눈물 나는 그의 삶을 알아보겠다. 내 글 솜씨로 눈물 나게는 못쓰겠지만 이 사람의 인생을 내노라하는 글쟁이가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로 만든다면 아마 관객들 반절 이상은 훌쩍거리고 난리가 날 것이다.
리파티는 1917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티 출생이다. 집안 자체가 음악과 무척 친숙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그 이름도 유명한 사라사테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던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또한 모든 음악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훌륭한 스승이 그의 대부(代父)였는데 바로 루마니아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조르주 에네스쿠(George Enescu)였다.
어릴적부터 신동이었던 대다수 거장들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리파티 역시 어릴적부터 무척이나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이를테면 한 번 들은 곡은 그대로 연주할 줄 아는 절대음감을 가진 것이랄지 10살도 안된 꼬마아이가 작곡을 한다든지 등의 것들이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적 재능, 그리고 에네스쿠라는 훌륭한 스승까지 두었지만 정작 그는 어렸을 때 음악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틀에 갇힌 정규교육이 리파티의 천재성을 해치는 것을 염려한 부모의 걱정도 있었고 게다가 그는 건강이 무척 좋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뭐 조금만 무리하면 픽픽 쓰러질 정도로 심하게 지치고 피곤함을 호소하는 허약체질이었기에 쉽게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학교를 다니진 않았지만 리파티는 집안에서 더 좋은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데 오히려 정형화된 교육을 받지 아니한 점이 그의 음악세계를 더욱 풍부하게 하였던 것이다.미하일 요라(Michel Jora)에게서 작곡을 배우며 피아노보다 작곡을 더 먼저 공부한 리파티는 11살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카레스트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플로리카 무지스쿠(Florica Musicesco)라는 훌륭한 스승에게서 피아노를 배운 리파티. 13세의 나이에 그가 즐겨 연주했던 곡 중의 하나인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면서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고 피아노 소나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티네 등의 작곡도 함께 하며 에네스쿠 상을 받기도 하는 등 음악학교내에서 그와 견줄 수 있을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1933년엔 리파티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불과 16세의 나이에 빈 콩쿨에 출전한 것이다.
불과 16세에 빈 콩쿨에 출전한 리파티는 2위를 차지하였다. 이유는? 불과 16세였기 때문에 아직은 너무 어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재능과 나이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강하게 반발한 심사위원이 있었으니 향후 리파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주게 될 그의 스승, 알프레드 코르토였다. 코르토는 심사결과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심사위원직을 사퇴하고 만다.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에 2인자가 되었지만 리파티는 그보다 더 큰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콩쿨 당시 그를 전적으로 지지했던 코르토가 파리로 그를 초청하여 스승이 되길 자청한 것이다. 참고로 알프레드 코르토라는 인물은 수많은 지휘자, 피아니스트를 키워낸 20세기 전반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교육자였던 인물이다. 클라라 하스킬을 비롯, 지휘자 이고르 마르케비치도 코르토의 제자였으며 20세기 전반기에 피아노 연주의 사조를 선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리파티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코르토의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타고난 재능에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더해 완벽한 천재 음악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스승들은 피아노의 코르토, 작곡의 나디아 블랑제, 이고르 마르케비치, 그리고 지휘에 샤를 뮌쉬 등이었다. 진정한 멀티플레이어 음악가. 디누 리파티의 성공시대는 여기서부터 열리는 듯 했다.
너무도 짧았던 영광의 시절
연주회장의 리파티. 그의 연주회는 전 유럽을 떠들석하게 하며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할 수 있었으나 내외적인 고통은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코르토의 제자가 된지 5년. 리파티는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연주회를 갖기 시작했다. 1940년 이후부터 그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연주회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모두들 천재 피아니스트가 등장했다며 환호했고 평론가들은 완벽한 그의 연주에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기에 바빴다.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던 리파티. 그에겐 진정한 거장의 덕목인 겸손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곡이라며 연주회 레퍼토리에서 제외할 정도였다. 클라라 하스킬과의 일화도 있다. 하스킬은 아들뻘 되는 리파티를 무척 아꼈고 둘은 서로를 무척 존경했다. 하스킬은 리파티의 재능을 무척 부러워했고 그를 칭찬하기 바빴으나 정작 리파티는 자신의 연주회에 하스킬이 나타나자 연주회를 취소했다는 일화도 있다. 감히 하스킬 앞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럽고 불경스럽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리파티에게 내려진 이 영광의 순간들은 정확히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한 후 리파티는 어떤 연주회도 가질 수 없었고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1943년에 루마니아에 돌아온 리파티는 다시 스위스의 제네바로 그의 연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마들렌 칸타쿠젠(Madeleine Cantacuzene)과 함께 피난을 떠난다. 이 곳에서 리파티는 잠깐이나마 제네바 음악원의 교수직을 맡기도 했고 마들레느와 결혼도 하며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천재 음악인에겐 또 하나의 어두운 기운이 엄습하고 있었다. 바로 백혈병이었다. 백혈병에 걸린 리파티는 이후 6년간의 긴 투병을 하게 되고 결국 삶을 마감하게 된다.
칼베르로 향하는 무거운 발걸음
리파티와 그의 아내인 마들레느. 두 사람 모두 피아니스트였다. 전쟁이 나서 여기저기 도망다니기 바빴던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난 뒤엔 투병생활을 하느라 또 고생만 하게 된다. 슬픈 이야기.
어릴적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학교에도 가지 않았던 리파티는 성인이 되어서도 늘 건강을 염려해야 했다. 제네바에서 피신생활을 할 때부터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고 많은 연주회가 취소되어야 했다. 절대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권유를 받고 부인 마들레느와 함께 몬타나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 리파티는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망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리파티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열심히 예술혼을 불태우며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연주회에서도 최선을 다했으며 그가 사망하기 3년 전에 열렸던 영국에서의 순회연주, 그리고 EMI와의 녹음활동은 큰 호평을 받았다. 1946년부터 5년간 혼신의 힘을 다해 녹음한 음반들은 지금까지도 리파티의 고귀했던 예술세계를 알려주는 귀한 자료로 지금껏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게 되면서, 이제 얼마 살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 더더욱 온몸을 불태우며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기간이 5년이었다.
병마는 더더욱 리파티의 목숨을 옥죄어왔다. 현기증, 구토, 고열이 계속 이어졌고 리파티에게도 죽음의 두려움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주를 계속 하는 것만이 마지막까지 자신이 신의 악기로 충실히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 리파티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녹음과 연주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950년 9월 16일. 그는 생애 마지막 연주회를 갖게 된다. 프랑스의 브장송(Besançon) 에서 열린 음악제였다.
이날 브장송에서 열린 이 슬픈 연주회를 그의 부인 마들레느는 이렇게 회상한다.
짧았지만 빛났던 그분 생애의 종점이었습니다. 그 분은 2개월 뒤인 12월 2일, 33세로 죽을 운명앞에 놓여있었습니다. 병이 아주 깊었는데도 그분은 브장송 연주의 약속을, 그 계약을 지키고 싶다고 했습니다. 주치의가 설득하여 중지시키려 했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만큼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다는 리파티의 결의가 굳었던 것입니다. 콘서트는 음악에 대한 그분의 맹세였습니다. 그일을 그분은 중대한일이라고 생각하고 음악을 통해 자기 연주를 듣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분은 아주 쇠약해져서 우려할만한 상태로 연주회 날 저녁 브장송에 도착했으므로 피아노 연습을 하기 위해 연주회장인 살 뒤 바를르망(고등재판소 홀)에 가는 것조차 힘겨웠습니다. 호텔에 돌아오자 그분의 충실한 벗인 주치의가 연주회를 중단해야겠다고 만류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리파티는 완강하게 ‘나는 약속했다. 나는 연주를 해야 돼’라고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기운을 차리기 위해 주사를 연거푸 몇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자동 인형처럼 옷을 갈아입고 홀로 데려다 줄 자동차가 있는데까지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그분에게는 정말 칼베르(그리스도가 못박힌 고장)로 향하는 발걸음과 같았습니다.
폭발적인 갈채가 홀에 도착한 그분을 맞이했습니다. 각처에서 모여든 청중은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청중은 죽어가고 있는-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이 젊은 천재의 마지막 연주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중략)
연주회장에 있던 사람이라면 그 가슴 찢어지는 듯한 결별을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죽은 별이 환한 광명으로 아직도 우리에게 빛을 베풀어 주듯이’ 리파티의 예술은 우리의 마음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 빛의 전언(傳言)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교훈이며 기쁨입니다.
뜨거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이날의 마지막 레퍼토리는 쇼팽의 왈츠. 그는 삶의마지막 순간이 촉박해온 것을 느꼈음인지 아주 빠른 속도로 14곡의 왈츠를 연주한다. 5번부터 시작하여 6, 9, 7, 11, 10, 14, 3, 4, 12, 13, 8, 1번까지 연주한 리파티는 마지막 2번 왈츠만은 힘이 부쳐 더 이상 연주할 수 없었다. 수많은 청중들은 리파티의 너무도 애처로운 대가의 마지막 순간을 숨죽이고 흐느끼며 볼 수밖에 없었다.
생의 마지막 연주회인 브장송 연주회의 마지막 연주곡인 쇼팽의 왈츠 8번과 1번. 리파티는 급하게, 급하게 연주한다. 그에겐 더 남아있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눈물의 브장송 연주회를 마친 리파티. 병원에 다시 입원한 리파티는 그 후 3개월을 더 못살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50년 12월 2일이었다.
리파티는 숨을 거두기 30분전까지 그의 아내와 함께 베토벤의 F minor 현악사중주 곡을 듣고 있었던 중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위대한 작곡가가 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저런 음악을 작곡하려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악기가 되어야 해요’
디누 리파티. 그는 클라라 하스킬이 부러워할 만큼 대단한 천재였고 짧았지만 강렬했던 그 영광의 순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늘 겸손했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언제나 신의 악기가 되길 바랬다. 신의 악기가 되길 원했기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수많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33년의 짧은 삶을 살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임했던 삶의 자세는 언제나 종교적 의미를 되새기며 겸허함을 알았던 위대한 것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리파티야말로 신이 선택한 가장 훌륭한,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짧았기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악기였다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리파티가 남긴 유산
리파티의 손. 그는 작은 체구에도 한 번에 12도를 내려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손과 굵고 힘있는 팔을 가지고 있었다.
리파티에게 허락된 불과 5년여의 짧은 시간동안 남겼던 명반을 살펴본다. 그가 남긴 레코드는 모두 10매인데 앙세르메와 함께 작업한 슈만 피아노 협주곡 외엔 모두 EMI와 녹음한 것들이다. 많은 음반이 있지 않기에 그가 남긴 음반들이 리파티의 전과 후의 세대를 살다간 숱하게 많은 거장들의 것과 비교하여 독보적인 명반이라고 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랄지 쇼팽의 연습곡, 왈츠 등은 지금까지도 리파티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역사적인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슬픈 삶을 알기에 그가 남긴 음반을 들으면 슬픈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와 같은 감정을 배제하고 그의 연주를 접해도 그가 얼마나 탁월한 연주자였는지 느낄 수 있다.
리파티는 바흐, 브람스, 쇼팽, 슈만, 스카를라티 등의 곡을 해석함에 있어서 독보적인 경지에 올랐다는 극찬을 받았다. 다른 것보다도 리파티의 연주에 살아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노래였다. 그는 어떤 곡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스승인 코르토는 리파티를 이렇게 극찬했다.
'모차르트, 바흐, 베토벤, 쇼팽. 어느 작품이나 단순한 음표를 초월하여 그 정신의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확실한 이해력을 가진 피아니스트'
코르토가 이토록 극찬할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33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히 세상을 떠난 리파티. 그가 남긴 마지막 브장송 연주회 실황음반은 디누 리파티라는 이름과 함께 클래식 음악사상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명반으로 기억되고 있다.
리파티가 사망한지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이시간에도 수많은 연주자들이 남긴 수많은 명연주와 명음반들이 나오고 있다. 리파티가 남긴 오래된 연주들은 모노 레코딩이라 음질도 좋지 않고 어느새 빛바랜 회색 사진 속의 인물처럼 어색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 세기의 피아니스트가 남긴 숱한 명반들 속에서 리파티가 남긴 슬픈 유산들은 어느덧 그 위치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옛날의 리파티가 실현하고자 했던 숭고한 정신은 지금을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지표, 교훈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한 번쯤 디누 리파티라는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해야 할 이유이다.
리파티가 연주하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
일본 도시바-EMI에서 발매한 the art of dinu lipatti 8CD 시리즈이다. 오늘 소개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비롯하여 브장송 공연실황, 그 외에 리파티가 EMI와 작업하며 남긴 음원들이 망라되어 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워낙 유명한 곡이니만큼 숱하게 많은 음반들이 있다.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음반은 폴리니-카라얀의 음반과 치머만-카라얀의 음반이 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리파티-카라얀의 음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명반이다. 카라얀이 다른 협주곡을 녹음한 것에선 혹평을 면치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곡에서만큼은 도가 텄다고 할만큼 뛰어난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또한 리파티의 청량하면서도 힘찬 타건은 이 곡 특유의 다이나믹하면서도 우수에 젖은 듯한 매력을 잘 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Dinu Lipatti (piano)
Herbert von Karajan (conductor)
Philharmonia Orchestra
녹음: 1948/4/9,10 Mono
장소: No.1 Studio, Abbey Road, London
전악장 연속재생
I.Allegro affettuoso
II.Intermezzo
III.Allegro viv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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