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들. 리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고 리스트의 벗들이 연주를 경청하고 있다. 저 뒤에 떡하니 팔짱을 낀 사람이 파가니니, 파가니니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기댄 사람은 로시니, 그리고 그들 옆엔 베를리오즈의 모습도 보인다.

PAGANINI: Variations on "Dal tuo stellato soglio" - from Mose in Egitto by Rossini op. 24

18세기말에서 19세기 중반을 관통하며 바이올린의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 인물이었던 파가니니. 파가니니의 기이한 행동과 그에 얽힌 괴상한 이야기들은 너무도 많아서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이다. 성생활도 매우 문란해서 죽을 때까지 매독으로 고생했다. 그 외에도 폐결핵, 류머티즘, 후두염, 신경장애 등 온갖 병을 달고 다닌 종합병원이었다. 전 유럽을 한 대의 바이올린으로 정복하며 이탈리아의 국민적 스타로 등극하였지만 제자도 없었고 유파도 없었다. 작곡보다는 즉흥연주를 즐겼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지만 유언장엔 교회를 위해 기부할 뜻이 없음을 밝힌 죄로 무려 36년간이나 그의 시신은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거짓말 같은 일화도 있다. 파가니니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간, 진정한 기인이었던 것이다.

엘러스-단로스 증후군(Ehlers-Danlos syndrome) 환자의 모습. 손가락이 손목의 뒤까지 젖혀지고 마치 연체동물처럼 관절, 피부가 쭉쭉 늘어나는 골치아픈 병이다. 파가니니 역시 이 증후군의 환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손가락이 맘대로 유연했기때문에 파가니니는 자신만이 연주할 수 있는 초고난이도의 곡을 작곡, 연주할 수 있었다.

성격이야 달리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무척 괴팍했고 조울의 진폭이 컸다. 그만큼 파가니니는 체질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임과 동시에 사람들에게 존경도 못 받은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또 그렇진 않았다. 리스트는 19세 때 파리에서 열린 파가니니의 연주회를 보고 한눈에 반해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 존경과 노력의 일환으로 작곡한 곡이 바로 파가니니에 의한 초절기교 연습곡(6 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d'apres Paganini)이다. 리스트처럼 파가니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들만이 파가니니에게 존경을 표한 것은 아니었다. 브람스, 라흐마니노프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by Paganini),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라는 곡을 썼을 정도로 존경심이 각별했다.

파가니니는 당대의 음악가들과의 친분도 꽤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파가니니의 최말년인 1838년에 파리에서 마지막 생활을 마치고 떠날 땐 평소 깊은 친분이 있던 베를리오즈의 연주회에 참석, 2만 프랑의 거액을 희사한 적도 있었다. 또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곡의 또 다른 주인공인 로시니와도 친분이 있었다. 나이는 열 살 차이였고 추구하는 음악의 세계는 달랐지만 둘은 꽤 친하게 지냈다. 그 예로 로시니가 지금은 거의 알려지지 아니한 작품인 이집트의 모세(Mose in Egitto)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자 파가니니는 그 주제 중 `그대는 빛나는 왕자`를 빌려와 몇 곡의 변주곡을 만들었다. 그 외에도 거의 알려지지 아니한 곡이지만 로시니의 ‘신데렐라’라는 오페라에서 주제를 빌려와 변주곡을 작곡한 것도 있다. 이처럼 파가니니는 로시니와 음악으로 교류를 나누며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원작인 로시니의 오페라는 현재로선 거의 접하기 힘든 곡 중 하나이다.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로시니란 작곡가는 당대엔 베토벤을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하며 최고의 스타로 살았지만 사후까지 예술성을 인정받는 작품은 10% 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오페라의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건...내가 꼭 여기에 써 붙일 필요가 있을까? 아마 구약성서의 내용을 알고 있거나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이집트에서 불쌍한 중생들을 구하고저 신의 계시가 적힌 십계명과 지팡이를 들고 탈출을 하던 모세 일행. 그러나 홍해(red sea)앞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이 발생하고. 모세는 신이 내린 기적의 힘을 빌어 홍해를 쫘~악 두 개로 가르며 육로를 만들어 유유히 그를 따르는 불쌍한 중생들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이다. 바로 홍해가 둘로 갈라지는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곡이 은은히 울려펴진다.


이 곡에 대한 에피소드는 또 하나 있다. 파가니니가 이 곡을 연주하려 하자 그의 악마와 같은(파가니니는 실제로 악마의 화신이라 불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진짜 악마인 줄 알고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과 공포를 느꼈다) 연주실력을 질투한 나머지 바이올린의 모든 줄을 다 끊어버리자 한 줄(G 선)으로만 연주했다는 이야기다. 아마 사람들의 눈엔 이 곡을 작곡한 파가니니도 모세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피아노 반주와 한 대의 바이올린 곡으로 연주하는 실내악이지만 첼로로도 많이 연주하는 곡이다. 내가 처음 이 곡을 듣게 된 것은 그 유명한 모리스 장 드롱의 기품이 넘치는 연주로 들었으나 그의 음반은 내가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대신 기품, 우아함, 세련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또 하나의 거장 피에르 푸르니에의 연주로 듣겠다. 이제 그토록 푹푹 쪄대던 살인적인 더위의 여름도 얼른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오길 기대하면서 좀 차분한 음악으로 골라봤다. 선선한 가을바람, 가을의 정취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감상해 보시길.

Pierre Fournier, violincello
Lamar Crowson, piano
녹음: 1969/01/08-10 Stereo, Analog
장소: Plenarsaal der Akademie der Wissenschaften, Residenz, Munich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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