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사진 찍을 땐 좀 웃어라. 웃으란 말야! 내가 웃어야겠냐? 네~! 형님. 훈장을 가슴에 매달고 어색한 웃음을 짓는 리히터, 그리고 므라빈스키. 두 사람 사이에 왠지 이런 대화가 오갔을 것 같지 않나?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in B flat minor op. 23(S. Richter, 1959)

날도 추운데 오랜만에 반가운 피아노 협주곡 하나 감상하겠다.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또 하나의 명곡,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다.

이 곡은 내 블로그에 카테고리까지 만들어서 소개할 만큼 여러 연주자의 명연으로 비교 감상하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알려진 수많은 명연들이 아직도 많이 있고 아직도 내 블로그에서 소개해야 할 명연주의 명음반이 너무도 많다. 기회가 될 때마다 차츰차츰 그 많은 명반들을 소개하겠다. 그리고 오늘은 그 명반들 중에서 빨갱이 나라 소련의 최고봉 피아니스트와 지휘자였던, 그냥 이름만으로 자체발광인 두 사람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와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연주로 소개한다. 언젠가 이 음반을 정말이지 꼭 한 번 올리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올리게 되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음반과 예전에 소개했던 리히터-카라얀의 DG 음반을 꼭 비교감상해보시기 바란다. 같은 연주자가 연주하는 같은 곡이지만 해석은 많이 다를 수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어떤 인물인가? 이미 내 블로그에 그의 수많은 연주를 소개하며 여기저기 그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 하나는 소개하고 싶다. 예전에 어떤 꼬마아이와 엄마가 모스크바 음악원에 갔을 때 한 피아니스트가 복도를 지나가는 걸 보고 너무 반가운 나머지 엄마가 호들갑을 떨었다.

“얘야. 이 분이 누군지 알아? 이 분은 전 소련 최고의 피아니스트란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맞받아 가로되

“아~!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그러자 그 피아니스트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문을 쾅~닫고 방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피아니스트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아니고 그와 동문수학한 절친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던 에밀 길렐스였다. 그 아이의 엄마. 얼마나 뻘쭘했을까?

또한 에브게니 므라빈스키는 또 누구인가? 이전 포스트에서 그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한 적이 있었지만 그는 강철의 독재자, 신이라 불리는 사나이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나서 다른 곡도 아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제대로 나올 때가 간혹 있는데 이 음반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련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니들이 소련 음악을 알아? 담배를 피우며 거만한 표정으로 인터뷰하는 므라빈스키가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 그리고 리히터에 대해 한 가지 에피소드가 더 있다.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이 열렸을 때 리히터는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이때 리히터는 우승자였던 23세의 텍사스 청년 반 클라이번에게 10점 만점 중 100점을 채점해버렸다. 아무리 클라이번이 뛰어난 연주를 들려줬다 한들 얼마나 귀찮았으면 그토록 무성의하게 채점을 했을까. 그리고 두 번 다시 콩쿨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지 못했다. 그에 반해 길렐스는 4회까지 콩쿨의 심사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명반 비교감상

오늘 소개하는 이 음반. 연말에 소개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DG 음반과구성은 똑같지만 느낌은 다르다.

이미 내 블로그에 4명(호로비츠, 리히터, 길렐스, 클라이번)이 남긴 역사적인 연주를 소개했는데 적어도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이 곡의 명반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편협한 판단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이 곡에 있어선 딱 네 사람의 연주 외엔 별로 들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본다. 호로비츠, 리히터, 길렐스, 그리고 여제(女帝)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이다.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배출한 수많은 명 피아니스트가 있지만 그 옛날의 전설적인 명인들의 연주와 비교할 땐 하나같이 별로인 느낌이다.

안동림의 저서 ‘이 한 장의 명반’에는 내 블로그에서도 소개했던 리히터-카라얀-빈 심포니의 DG음반을 명반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음반이야말로 연주와 음질에서 가장 보편적인 음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음반은 매니아들 사이에선 별로 재미없는 음반으로 소문난 음반 중 하나이다. 이 곡 특유의 광폭함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악장까지는 카라얀의 관현악에 리히터가 끌려가서 지루하게도 느껴지지만 3악장에선 다르다. 3악장에선 리히터가 질주하기 시작하며 카라얀을 압도한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3악장의 피날레에선 나도 모르게 기립박수를 치게 된다. 단, 이 팽팽한 긴장감이 3악장에서만 해당된다는 점이 아쉽다. 이 음반 녹음하고 나서 두 사람 사이가 나빠졌다는 에피소드 역시 유명하다.

뭐니뭐니해도 이 곡의 최고수는 호로비츠였다. 여러 종류의 음반을 남겼는데 토스카니니와 협연한 가장 유명한 1941년 음반은 예전에 소개했다. 그 음반 외에도 조지 셀과 협연한 1953년 음반, 1943년 토스카니니와 협연한 전쟁채권 모금 기념연주회 실황음반이 또 유명하다. 이 곡을 통해 정녕 인간의 능력 이상을 느끼고 싶다면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어보는 것이 좋다. 어떤 것을 택해도 넋이 나갈 정도의 기교를 느끼겠지만 그래도 1943년 라이브가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단, 워낙 옛날 음반들이라 음질은 좋지 않다.

앙드레 클뤼탕스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있는 길렐스. 육수깨나 빼면서 연주하고 있다. 이 동영상 실제로 보면 훨씬 무시무시하다.

나는 길렐스-로린 마젤의 1972년 연주를 가장 좋아한다. 사람의 열 손가락에서 어떻게 저런 파워를 뿜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어쩜 저렇게 정교하게 연주할 수 있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길렐스 역시 한 두 가지 음반을 남긴 게 아니지만 연주의 퀄리티, 음질까지 고려하여 최고로 평가 받는 건 뭐니뭐니해도 1972년 음반이다.

이 할매가 이래뵈도 젊은 시절엔 이렇게 얼짱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성별 불분명인 거야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지만.

아르헤리치 역시 이 곡을 수 차례에 걸쳐 녹음했다. 남편이었던 뒤트와와 협연한 음반부터 1995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협연한 마지막 음반까지 있다. 왜 마지막이냐하면 그녀가 더 이상 이 곡을 녹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가장 괜찮은 음반은 아무래도 키릴 콘드라쉰과 협연한 실황음반이 아닐까 생각한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음반도 음질은 역시 좋지 못하다. 리히터는 서방세계에 소개되기 전부터 이 곡을 녹음하였고 이 음반이 바로 당시에 녹음한 귀중한 음원이다. 리히터의 최전성기 시절에 녹음되었으며 3년 후, 서방세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어 서방세계의 대표 지휘자였던 카라얀과 녹음했던 연주와는 상당히 이질감이 느껴진다. 카라얀과 협연한 연주가 리히터답지 않게 다소 답답하고 느끼하게 느껴진다면 므라빈스키와 협연한 이 음반은 그 느끼함을 한 방에 뻥 뚫어주는 청량음료 같은 느낌일 것이다.

Sviatoslav Richter
Evgeny Mravinsky (conductor)
Leningrad Philharmonic Orchetsra
녹음: 1959 Mono
장소: Leningrad

전악장 연속재생

1악장-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 Allegro con spirito

2악장-Andantino semplice


3악장-Allegro con fuoc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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