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쿠벨릭(Rafael Kubelik). 20세기 체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휘자. 뜨거운 가슴으로 체코를 사랑했고 자유로운 예술을 사랑했기에 그의 인생은 참으로 곡절도 많았다.

DVORAK: Symphony No. 8 in G major op. 88

드보르작이 남긴 9곡의 교향곡 중 9번 외에 또 하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뛰어난 곡이 있다. 9번 다음으로 유명하지만 9번의 강렬한 빛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의 교향곡, 이른바 영국교향곡이라 불리는 8번이다.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특유의 편집증적인, 일반인들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아주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반해 드보르작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성질대로 때론 게으르고 때론 우울하게 살았던 괴팍한 예술가들의 삶이 아닌,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집안에서도 좋은 가장이었으며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자세가 그의 음악에서도 배어 나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음악이 바로 8번 교향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어느 악장의 어떤 부분을 들어봐도 밝고 활기찬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때론 세련되게, 때론 강인하게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드보르작 음악의 지향점은 그의 조국인 체코, 보헤미안 특유의 정서를 음악 속에 전사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8번 교향곡에는 드보르작이 표현하고 싶었던 체코, 보헤미안의 정서가 듬뿍 담겨 있다. 이 곡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9번 교향곡 ‘from the new world’처럼 ‘The English’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서 간혹 영국교향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곡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영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단지 이 곡을 처음 작곡한 이후 영국의 출판업자에게 원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이 곡의 분위기는 가장 전형적인 체코와 보헤미안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드보르작이 영국에서 대단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훗날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고 바로 그 학위수여식에서 이 교향곡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 체코의 날에서도 이 곡을 지휘하였다.

사실 이 곡은 가을날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가을 쯤에 내놓았어야 하는데…
어쨌든 가을에 이 곡을 듣고 싶다면 지금 아껴놨다가 가을이 되어 다시 내 블로그에 들러서 감상하시기 바란다. ㅎㅎ

체코 음악의 자존심, 영혼. 라파엘 쿠벨릭

각 나라마다 그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곡가와 지휘자, 연주가가 있다. 독일엔 베토벤과 푸르트벵글러가 있었고 구 소련엔 차이코프스키와 에브게니 므라빈스키가 있었다. 한국엔 자랑스러운 이름 윤이상과 정명훈이 있다. 그리고 동구권의 나라 체코를 대표하는 작곡가와 지휘자는? 이란 질문에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드보르작과 쿠벨릭을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라파엘 쿠벨릭이란 지휘자는 20세기 체코 음악을 대표하는 명인 중의 명인이었고 등불이며 영혼과도 같은 존재였다. 20세기 체코 음악에서 라파엘 쿠벨릭을 빼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위치는 절대적이나 그가 살았던 삶의 행적이 한 곳에 제대로 정착하지 않고 망명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하였고 굵직한 자리를 맡아서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소평가를 받기도 한다.

쿠벨릭은 1914년, 체코 프라하 근교의 비호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얀 쿠벨릭. 아들인 라파엘만큼이나 유명했고 한 시대를 풍미할 뻔 했으나 제대로 만개하진 못했던 초절정의 기교를 선보였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적 소질을 선보였던 쿠벨릭은 14세 때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바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주술과도 같은 지휘장면을 본 후였다.

라파엘 쿠벨릭의 아버지인 얀 쿠벨릭. 당대를 주름잡았던 최고의 기교파 바이올리니스트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야사 하이페츠 등의 신진세력에 밀려 큰 빛을 본 것은 아니었다.

쿠벨릭이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 것은 불과 20세 때였다. 16년의 기간 동안 바츨라프 탈리히에 의해 체코를 대표하는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성장해 있던 체코 필 하모닉의 상임지휘자가 된 것이다. 탈리히는 겨우 약관의 나이에 불과하지만 쿠벨릭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에 자신이 오랜 세월 동안 공들였던 체코 필을 쿠벨릭에게 넘겨주었다. 체코에서 가장 인정받는 지휘자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 후 1948년까지 12년 동안 2번, 9년간 체코 필의 상임을 맡으며 활약했다. 물론 그 당시까지의 쿠벨릭에겐 탄탄한 앞날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그의 길고 길었던 망명과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기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본 달콤한 시간이었다.

고집과 역마살-42년간의 망명생활

젊은 시절의 쿠벨릭. 1934년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그가 지휘자로서 처음데뷔했을 당시가 되겠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인생은성공가도만이 기다리고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힘에 의해 전 세계는 양극화 되었다. 그리고 소련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의 동구권 국가들은 오로지 힘의 논리 때문에 공산화가 되었다. 쿠벨릭의 조국인 체코도 마찬가지였다.
쿠벨릭은 자신의 조국에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인권을 탄압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바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이후 전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 정착한 곳은 영국이었다. 이후 스위스로 다시 망명하여 스위스 국적을 취득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아르투르 로진스키의 뒤를 이어 CSO(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아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하지만 쿠벨릭은 어느 한 곳에 제대로 머물러 있지 않도록 역마살을 타고 났던 것 같다. 이 곳에서도 음악적인 견해 때문에(레퍼토리가 협소하다는 비난) 곧바로 자리를 사임하고 또 다시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3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 되어 오페라에 많은 열정을 쏟아 부었지만 이 또한 수월하지 않았다. 이 기간은 1958년까지 그나마 오래 있었다. 그 후 1961년에 쿠벨릭으로선 제2의 전성기를 맞을 수 있는 중요한 자리를 잡게 된다. 독일 출신의 대지휘자 오이겐 요훔의 뒤를 이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상임의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쿠벨릭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음악활동을 펼치며 수많은 레코딩과 연주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다. 이 때의 기간은 무려 11년. 그의 인생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상임이란 타이틀을 내걸었던 적은 이 당시를 제외하곤 없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상임을 사임한 후엔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객원지휘자만을 맡았을 뿐 상임이랄지 책임 있는 자리를 더 이상 맡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떠돌이 생활만을 하였을 뿐이다.

42년의 망명생활 끝에 쿠벨릭이 다시 돌아간 곳은 결국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체코였다. 지난 젊은 시절에 조국이 공산화 되는 것을 볼 수 없다며 떠난지 어언 42년이 지난 후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 다시금 조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1990년 체코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쿠벨릭은 체코에 돌아와 그 옛날 자신을 진정한 지휘자로 만들어준 체코 필의 총감독을 다시 맡아 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며 조국의 음악발전에 힘썼다. 그렇게 한 평생 동안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쿠벨릭은 전 세계 음악팬들의 애도 속에 1996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진정 자유로운 예술혼을 추구하였고 이에 정치적 망명도 불사하였다. 이념으로 엇갈려 거칠기만 했던 역사의 풍랑 속에 자신을 내던져 여기저기 부딪치며 살아 왔지만 그는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키고자 처절하게 노력하였고 또한 자신의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쿠벨릭의 음악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에서 제2곡 '몰다우'를 지휘하고 있는 쿠벨릭. 그의음악인생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던 체코 필을 이끌고 지휘하고 있다.

쿠벨릭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 중 첫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이 레퍼토리의 협소성이다. 하지만 쿠벨릭이 레퍼토리가 협소하다는 것은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고전시대 음악가인 헨델, 바흐, 하이든부터 시작하여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와 베를리오즈, 그리고 슈만, 브람스의 낭만주의 작곡가들의 작품과 함께 힌데미트, 쇼스타코비치의 현대작곡가의 곡까지 대단히 넓고 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지휘자 중 쿠벨릭만큼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진 이는 찾아보기 드물다.

그가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레퍼토리는 대략 베토벤, 말러, 브람스 등 독일-오스트리아 작곡가의 곡들과 체코의 작곡가들인 스메타나, 드보르작으로 나뉠 수 있다. 그 중 뭐니뭐니해도 쿠벨릭 음악의 본령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선 스메타나와 드보르작의 작품들이다.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드보르작 교향곡 7, 8, 9번은 쿠벨릭의 음반을 빼놓고선 절대 이야기할 수 없다.

쿠벨릭은 오페라와 협주곡보다는 교향곡, 교향시 등에 더 많은 공을 들였던 지휘자였다. 코벤트가든 왕립 오페라 극장의 감독 시절에 오페라 지휘자가 되기도 했었지만 그는 무엇보다 콘서트 지휘자가 더 어울린다는 것을 알고 교향곡의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미루어 봐도 알 수 있다.

드보르작 교향곡 8번의 명반

쿠벨릭과 베를린 필이 함께 만든 드보르작 교향곡 8, 9번 음반. 드보르작 교향곡을 수록한 음반 중에선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음반 중 하나이다. 다른 이유를 다 제껴 놓고 쿠벨릭의 드보르작이란 이름만으로 이미 가치가 있는 음반이 아닐까?

이 곡에서 가장 사랑 받는 악장이 있다면 바로 3악장이 되겠는데 3악장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표현한 음반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리곤 한다. 그 옛날의 브루노 발터부터 시작하여 조지 셀, 카라얀, 쿠벨릭, 줄리니, 콜린 데이비스 등 쟁쟁한 지휘자들이 내놓은 수많은 음반이 있다.


카라얀의 음반은 그가 남긴 대부분의 음반들처럼 세련되고 매끄럽지만 딱 거기까지만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발터와 셀의 음반이 무척 유명하고 정명훈의 음반도 아주 잘된 음반으로 평가 받는다. 이 중 어떤 것을 골라도 크게 뒤떨어지는 음반이야 없겠지만 드보르작 교향곡이라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했을 때 쿠벨릭의 음반에 맨 먼저 손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Rafael Kubelik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녹음: 1966/06/08-09 Stereo, Analog
장소: Jesus-Christus-Kirche, Berlin

전악장 연속재생


1. Allegro Con Brio


2. Adagio


3. Allegretto Grazioso - Molto Vivace


4. Allegro, Ma Non Troppo

Posted by sni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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