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NDELSSOHN: Song without Words in A, op. 62 no. 6, `Spring Song`
독주곡 2010. 6. 18. 23:36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초, 중반을 관통하는 낭만파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최고의 천재였고 그의 다방면에 걸친 능력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MENDELSSOHN: Song without Words in A, op. 62 no. 6, "Spring Song"
멘델스존이 남긴 관현악 ‘핑갈의 동굴 서곡’을 소개할 때 썼던 이야기지만 멘델스존은 서양 고전 음악가 중 극히 드물게 엄친아다운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평생 돈 걱정도 없이, 개인이나 가족사의 불행도 없이, 게다가 창작의 고통마저도 없었으니 멘델스존이 작곡한 음악에 베토벤, 브람스류의 진지한 고뇌와 처절한 감정이입이 느껴지지 않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멘델스존이 남긴 걸작인 ‘무언가(Lieder ohne Worte)’ 역시 멘델스존 특유의 달콤하고 서정적인, 마치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아름다운 곡이다. 그리고 이 곡이야말로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정점에 있던 멘델스존이란 작곡가와 멘델스존의 음악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형식, 구조에 지나치게 매몰되는 것도 아닌, 풍부한 서정성을 잘 살리고 있는 멘델스존이 남긴 모든 독주곡 중 최고의 예술성과 낭만성을 자랑한다.
‘무언가’는 한자로 쓰면 ‘無言歌’이며 글자 그대로 말이 없는 노래라는 뜻이다. 돈도 많고 여행을 좋아했던 멘델스존이 21세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했던(이탈리아 여행 후 작곡한 곡이 4번 교향곡 ‘Italian'이다) 시점부터 15년간 틈틈이 작곡한 곡을 각 여섯 곡씩 모두 8집으로 묶어 출판하게 되었다. 곡의 특징은 매우 짧은 소품들이란 것과 3부의 가요 형식으로 작곡한 것이다. 처음 작곡했던 당시엔 제6, 제12, 제29의 세 곡의 ‘베니스 곤돌라의 노래’와 제18 곡의 ‘이중창’만 표제가 붙었으나 훗날 가곡마다의 내용을 따라 거의 전곡에 표제가 붙고 일반화되었다. 뭐, 그렇다고들 한다. 나도 이 무언가의 모든 곡을 들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살면서 무언가의 전곡을 들어볼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오늘 소개하는 ‘봄 노래’는 지겹게 들으며 살겠지만.
예측이 불가능한 천재가 될 아이
예능 프로그램 스펀지를 보면 ‘~~~한 것은 네모다’라고 성우가 외치고 네모 속에 들어갈 퀴즈를 출연자들이 맞추는 코너가 있다. 출연자들이 자신의 지식, 상상력을 동원하여 네모 속에 들어갈 단어를 맞추기도 하고 너무 의외의 답이라서 맞추지 못하기도 하는데 정답을 공개하면 출연자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눈이 커지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그럼 나도 한 번 흉내를 내보겠다.
‘자동차에 쓰이는 중요한 부품인 와이퍼(wiper)와 쇼바(shock absorbers)를 발명한 사람은 네모다’
아마 이 문제가 스펀지에 그대로 출제된다면 출연자들이 상당히 놀랄 것이라 예상된다. 네모 속에 들어갈 정답을 이야기하자면 ‘피아니스트’이다. 놀랍지? 에디슨 같은 발명가도 아니고 자동차 엔지니어도 아니고 대학교수나 연구자도 아닌 피아니스트가 이와 같은 발명을 하였다는 것.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프만이 발명한 자동차의 앞 유리를 닦는 와이퍼와 차량의 흔들림을 막아주는 장치인 쇼바. 그가 이런 기막히는 발명을한 덕분에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문명의 혜택을 맘껏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연주자, 작곡가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대다수는 진정한 천재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어린 꼬마가 어려운 난곡들을 수월하게 연주하는 것 정도는 천재 축에도 못 끼는 식상한 레퍼토리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음악을 공부한 수많은 음악가 지망생 중 각종 콩쿨에서의 우승, 혹은 어떤 경로를 통해 음반까지 내고 연주회를 다니면서 이름을 알릴 정도라면 정말 엄격한 필터링을 거친 천재들 아니겠는가? 게다가 음악의 창작 또한 발명의 또 다른 표현이고 음악가들은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창작의 모티브를 떠올리며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단순히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에디슨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천재는 99% 노력과 1%의 영감이라고. 이 말을 정확히 풀이하면 99%까지 아무리 새빠지게 노력해도 1%의 영감이 없는 너희들은 나처럼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 소개하는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이란 사람 역시 19세기와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천재 중의 천재, 진짜 천재 피아니스트였다. 우선 그의 간단하고도 특이한 약력을 소개하겠다. Wikipedia에 보면 맨 첫 줄에 그를 이렇게 설명해놓고 있다.
‘Polish-American virtuoso pianist, composer, music teacher, and inventor’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음악 선생이며 발명가. 호프만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낭만파 피아니스트였다. 게다가 작곡가로서도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슈라 체르카스키 같은 뛰어난 제자를 배출한 훌륭한 스승이었고 70가지가 넘는 특허를 보유한 발명가였다. 뿐만 아니다. 남들은 하루에 아무리 짧아도 3시간 이상씩 꼬박꼬박 연습하며(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역시 연습벌레였고 하루 3시간 이상의 연습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엄수했다) 끝없이 기량을 연마했지만 호프만은 연주회를 앞두고도 1시간도 채 연습하지 않았다. 자신이 연주할 레퍼토리도 모른 채 연주회장에 들어가서 2년 반 전에 연주해보고 한 번도 손댄 적이 없는 곡을 너무도 태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모든 피아니스트가 불철주야 연습에 매달릴 때 그는 혼자만의 연구실에서 세상과 담을 쌓고 그저 발명에 열중했던, 참으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스승이며 19세기 최고의 러시아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안톤 루빈스타인은 7세의 호프만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듣고 난 후 예측이 불가능한 천재가 될 아이라며 극찬을 거듭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안톤 루빈스타인의 제자가 되기에 이른다.
내 블로그에서 이미 많은 천재 음악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은 또 하나의 천재인 요제프 호프만에 대해서 이야기해본다.
신동-치명적인 질병과도 같은 삶
어린 시절의 호프만. 10살도 채 안된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신동, 천재,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의 환생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애를 너무 혹사시킨다며 팬들의 만류로 연주회를 취소할 정도였다.
20세기를 살았던 연주자 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 수많은 신동 중 그 재주를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맘껏 펼치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람을 딱 두 사람만 꼽는다면 아마도 바이올린의 야사 하이페츠, 그리고 오늘 이야기하는 피아노의 요제프 호프만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딱 한 사람만 꼽는다면 바로 호프만이 될 것이다.
우선 하이페츠가 남긴 말을 인용해 본다. 하이페츠는 신동으로서의 삶을 치명적인 질병 같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은 몇 안되는 신동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치명적인 질병. 하이페츠의 이 짧은 한 마디를 분석해본다. 치명적인 질병이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주위로부터 받아야 했던 끝없는 찬사, 하지만 그 찬사 뒤에 숨겨진 많은 기대와 부담감, 그리고 여기에 부모의 욕심까지 더해지면 그 신동의 삶은 엄청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더구나 성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번뜩이는 천재성이 반감되었다는 주위의 평가까지 받기 시작하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땐 더 이상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이페츠와 호프만은 이토록 많은 난관을 뚫고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전설로 남은 몇 안 되는 신동이었다.
이들도부디 망가진 신동, 망가진 성인이 되진 말아야 할터인데-격하게 사랑하고 아끼는 삼촌팬 중 1人
호프만은 1876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가 모두 음악가였는데 아버지는 피아니스트겸 작곡가, 어머니는 성악가 출신이다. 다섯 살 때 바르샤바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고 여덟 살 때부터 유럽을 돌며 순회연주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 1887년부터 미쿡으로 건너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개 연주회를 가져 미쿡팬들을 경악하게 하였고 미국의 언론은 그의 천재성을 모차르트, 멘델스존과 비교할 정도였다. 그러나 1887년 11월 29일에 처음 열었던 이 연주회의 엄청난 성공이 어린 나이의 호프만에겐 큰 짐으로 돌아왔다. 1887년 12월에 접어들자 호프만은 10주간 무려 52회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연주회를 소화해내야 했다.
11세의 소년이 10주간 52회의 연주회를 한다는 것. 분명히 어린 소년에겐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엔 예상치 못한 호프만의 인기에 갑자기 눈이 뒤집힌 아버지의 욕심이 한 몫 했다. 아들의 모습 뒤로 돈다발이 펄럭거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뉴욕의 아동학대 방지협회에서 연주회를 주4회로 제한할 것을 요구했고 감시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호프만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건당 만 불씩 더 많은 연주회를 열어 돈을 벌었다. 결국 클락이라는 독지가가 나서서 5만 불을 호프만의 아버지에게 주며 더 이상의 연주회를 취소케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호프만과 가족들은 1888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호프만은 1894년까지 아무 연주회도 당대 최고의 스승들 밑에서 배울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갖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19세기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대부 격인 인물인 안톤 루빈스타인이었다. 루빈스타인은 어릴 적부터 호프만의 재능을 눈여겨보았고 결국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루빈스타인에게 유일하게 개인적으로 지도를 받은 학생으로 남게 된다.
아동학대 방지협회와 뉴욕의 언론, 팬들의 성화, 게다가 독지가까지 나서서 한사코 반대했던 호프만의 무리한 연주회 일정. 어찌 보면 일어날 수 없는, 드라마와도 같은 해프닝을 통해 소년 호프만은 겨우 6년간의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며 진정한 피아니스트로 진화하기 위한 토양을 다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호프만 본인은 이 6년의 시간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정작 호프만은 이 6년의 시간이 좋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싹수가 보이는 어린 아이를 직업적인 연주자로 키우기 위해선 어릴 적부터 프로가 되기 위한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전문가들 앞에서 연주하며 그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꼭 필요한 것인데 남들이 위해준답시고 극구 반대한 연주회 취소는 결국 자신에게 6년의 시간낭비뿐이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20대-신동에서 거장으로
호프만의 작은 손. 그의 친구이자 당대의 라이벌인 라흐마니노프가 13도를 내리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손의 소유자였던 것에 반해 호프만은 아주 작은 체구와 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테크닉은 너무도 완벽했다.
안톤 루빈스타인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신동 호프만은 1894년 안톤 루빈스타인 대회에서 루빈스타인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하며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루빈스타인은 이 대회가 끝난 후 호프만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도, 배울 것도 없다며 호프만이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었음을 인정해준다. 그리고 호프만은 그 해부터 다시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살인적인 연주회 스케줄을 소화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연주회에서 연주를 했던 호프만. 그의 인기는 어딜 가나 폭발적이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의 신동이 성인이 되면서 번뜩이는 천재성이 반감되는 경향이 많지만 호프만은 철저히 예외였다. 그의 천재성을 말해주는 많은 사례가 있지만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추려본다. 미리 이야기해두겠는데 너무 놀라지는 마시라. 자신의 보잘것없는 능력과 비교하며 자괴감에 빠지지도 말고.
-1909년에 열린 연주회. 자신이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주회장에 들어간 호프만. 2년 반 전에 연주해보고 이후로 손댄 적도 없는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완벽하게 연주했다.
-1912년에 열린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연주회. 이곳에서 21회의 연주회를 하는 동안 그는 단 한 곡도 겹치는 곡이 없이 무려 255곡을 연주했다.
-트빌리시에서 열린 연주회. 연주회 기간 동안 요셉 레빈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연주회 당일 오후 호프만은 레빈의 집에 방문했고 레빈이 리스트의 ‘로렐라이’라는 곡을 연주하는 것을 난생 처음으로 듣게 된다. 그날 저녁, 레빈 부부는 호프만의 연주회에 참석했는데 호프만은 이들 부부 앞에서 앵콜곡으로 난생 처음으로 들었던 ‘로렐라이’를 완벽하게 연주했다.
-폴란드 출신의 대 피아니스트이자 편곡의 대가였던 고도브스키와 호프만은 절친한 사이였다. 어느 날 고도브스키가 스트라우스의 ‘박쥐 서곡’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해서 연주하는 것을 호프만이 유심히 듣게 된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하루 종일 그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에 호프만은 고도브스키 앞에서 그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는 놀라운 모습을 선보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도브스키 자신도 편곡 중이었던 곡이고 아직 악보에 기보하지도 않은 상태였다는 것.
이처럼 호프만은 어린 시절의 천재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성인이 되어서도 완성된 거장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환호와 열광을 보내주었던 미쿡에 건너가서 다시금 어메뤼컨들을 열광시켰으며 1926년에 미국시민권을 취득,평생 동안 살게 된다.
호프만과 당대의 자웅을 겨뤘던 또 하나의 대 피아니스트가 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이름보다는 작곡가로 더 유명한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였다. 두 사람은 라이벌이기도 했지만 아주 친한 친구사이였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했다. 한 인터뷰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누구냐고 라흐마니노프에게 묻자 호프만이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또한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걸작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하여 호프만에게 헌정하며 초연을 부탁했으나 천하의 호프만도 그 깨알같이 많은 음표를 보며 연주하기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고사했다는 일화도 있다. 결국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초연으로 발표되었다.
라흐마니노프와 호프만은 아주 친한 사이였고 닮은 점도, 다른 점도 있었다. 우선 두 사람 모두 과묵하고 평소에 밝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은 닮은 점이다. 또한 당대를 주름잡는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아 슈타인웨이사에서 두 사람을 위한 피아노를 제작했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이에 반해 다른 점을 꼽는다면 일단 체격이다. 라흐마니노프는 마르팡 증후군(Marfan syndrome)이란 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병은 인간의 15번 염색체에서 fibrillin 1 단백질의 이상현상으로 인해 골격, 관절 등에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유전병으로 라흐마니노프가 큰 키와 엄청나게 크고 긴 손과 손가락을 가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농구선수 한기범도 이 병을 앓고 있다. 이에 반해 호프만은 매우 작은 체격, 작은 손과 짧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슈타인웨이사는 호프만을 위한 피아노를 특별히 제작하였다.
두 사람의 중요한 차이점을 또 하나 꼽는다면 작곡 능력이다.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보다 작곡가로서의 이름이 훨씬 유명한 반면 호프만은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드보르스키 (Michael Dvorsky)라는 필명으로 몇몇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했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곡은 거의 없다.
연주 스타일 또한 달랐다. 라흐마니노프는 서정적이고 음울한 분위기가 깔린 스타일의 연주를 구사했지만 호프만은 흥얼흥얼 노래를 하는 듯한 자연스럽고 깨끗한 음색을 가진 연주가 특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특징은 그의 제자였던 슈라 체르카스키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호프만은 후학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1924년 커티스 음악원의 초대 과장으로 있다가 1927년에 총책임자가 되었다. 1938년에 은퇴할 때까지 커티스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가장 유명한 제자로 앞서 언급한 슈라 체르카스키가 있다.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천재의 삶
1937년에 열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 이 공연의 실황음반은 VAI사의 레이블로 판매 중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각광받고 그 천재성을 고스란히 이어 가며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성공했던 호프만.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호프만은 성격 자체가 과묵하고 다른 사람들과 활발하게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에 충실했으며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 외엔 자신의 연구실에서 발명하는 것을 무척 즐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동차 앞 유리의 와이퍼를 피아노의 메트로놈을 보며 발명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천연석유를 연료로 하는 용광로, 자동차의 부품인 쇼바와도 같은 피아니스트의 삶에선 상상하기도 힘든 발명품을 쏟아내며 70가지 이상의 특허를 받았다.
이처럼 호프만이 발명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11세의 나이에 처음 만난 에디슨이다. 에디슨의 연구실에 초대된 호프만은 에디슨의 수많은 발명품을 보고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발명에 꽂히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에디슨과의 인연으로 호프만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가지 사건을 기록하게 되는데 1887년에 역사상 최초로 실린더 레코딩을 통해 그의 연주를 녹음한 것이다.
이처럼 과묵한 성격에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것을 좋아한 호프만. 그는 가정생활에서 행복하지 못한 남편, 가장이었다. 1927년에 이혼을 하였고 다시 재혼하여 세 명의 아들까지 두었다. 그리고 말년의 호프만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1930년대부터 술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1938년에 커티스 음악원에서 은퇴할 때부터 술, 정신적 피폐, 게다가 피아니스트로서의 목적과 동기 상실로 인해 피아니스트의 삶은 거의 포기 단계에 이르게 된다. 피아노 연습보다는 발명하는데 더 많이 집중하였고 193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열린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 공연 후 많지 않은 연주회만을 열면서 살아가던 호프만은 1946년 70세의 나이에 카네기 홀에서 은퇴 연주를 갖게 된다. 그리고 1957년 2월 16일에 8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너무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호프만은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적인 재능의 소유자였고 가는 곳마다 신동 중의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성장했다. 대다수의 신동들이 성인이 되면서 주위의 지나친 기대감에 부담을 느끼고 어린 시절의 재능이 소멸되는 것에 비해 호프만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재능을 맘껏 펼치며 일신의 영광과 후학양성에도 대단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음악가로서의 재능 뿐만이 아니라 발명에도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며 70가지 이상의 특허권을 가진 그는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만 보면 호프만이라는 천재의 삶은 행복하고 존경만 받으며 살았던 것 같지만 호프만은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두 번 결혼했고 50이 넘어서부터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81세로 사망할 때까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천재의 삶이란 천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마네킹, 박제된 동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호프만의 삶을 들여다보면 명예욕보다 편안한 자유를 더 사랑했기에 말년을 편안하게 보낸 라자르 베르만의 삶을 역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호프만의 음악
호프만이 남긴 많지 않은 음반 중 하나. VAI 시리즈 중 은퇴하기 직전까지 말년의 녹음을 담고 있다. 전성기를 이미 지난 시절의 연주이지만 칼날같은 기교와 진한 서정성은 변함없다. 오늘 소개하는 멘델스존의 '무언가'를 비롯하여 베토벤, 쇼팽,라흐마니노프,루빈스타인의 여러 곡을 수록하고 있다.
호프만은 가장 순수한 열정을 지닌 낭만파 피아니스트였다. 아름다운 서정성과 함께 오차 없는 정확하고 힘찬 타건, 빈틈없는 테크닉은 호프만이 동시대를 살았던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 알프레드 코르토 등과 차별화되는 그만의 특징이다.
호프만은 아주 레퍼토리가 다양한 피아니스트였으나 남긴 음반은 많지 않다. VAI(Video Artists Int'l) 회사에서 나온 시리즈 음반 정도를 찾아볼 수 있고 이 음원을 모아서 만든 PHILIPS의 ‘Great pianists of the 20th Century’ 시리즈의 음반이 하나, 그리고 복각전문 회사 NAXOS, Music and Art사에서 발매한 음반 정도가 구할 수 있는 음반의 전부이다. 또한 음질 역시 워낙 옛날 녹음이라 좋지 않다. 특히 NAXOS라는 회사는 복각전문 레이블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음질을 자랑하지만 음질은 보장할 수 없다.
쉽게 구하긴 힘들지만 VAI에서 나온 1~8 시리즈 음반은 호프만의 역사적인 녹음, 독주곡, 협주곡을 비롯한 연주실황을 죄다 들을 수 있으니 이를 구한다면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비록 옛날 녹음이라 비 내리는 소리도 많이 들리지만 리스트의 ‘Liebestraum’랄지 쇼팽의 녹턴, 왈츠 등의 연주는 아주 훌륭하며 왜 그가 그토록 천재로서 한 평생을 살 수밖에 없는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된다.
무언가의 명반
무언가는 노래는 노래인데 말이 없이, 인간의 목소리 없이 한 대의 피아노로 아름답게 노래하듯이 연주하는 곡이다. 그만큼 자연스럽고 서정적이며 아름다운 느낌을 잘 살려야 한다. 대표적인 음반은 전통의 명반인 기제킹의 음반이 있다. 가장 직관적인 신즉물주의의 연주법을 잘 살린 기제킹이 남긴 걸작 음반으로 꼽힌다.
이 곡을 수록한 음반 중 전곡을 수록하고 있는 음반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제킹 역시 전곡을 녹음하진 않았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남긴 음반이 있는데 인간 바렌보임을 싫어하는 내가 그의 음반을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꼭 피아노로 연주한 곡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곡으로 편곡되기도 하였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아름다운 현악과 목관악의 연주로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Josef Hofmann: piano
녹음: 1945/07/30 Mono
장소: unkn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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