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곡

SCHUMANN: Myrthen op. 25- Du bist wie eine Blume

sniper 2010. 6. 13. 01:54

미르텐(myrthen)의 꽃. 결혼하는 신부를 상징하는 이 꽃의 시를 하이네가 썼고 슈만은 하이네의 시에 곡을 붙여 26곡의 가곡집을 완성하였다. 그리고결혼 전날에 가곡집을 신부인클라라에게 바쳤다.

SCHUMANN: Myrthen op. 25- Du bist wie eine Blume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비크는 수 년간에 걸친 뜨거운 열애, 그리고 법정공방까지 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1840년에 결혼하였다. 1840년은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으나 좌절하고 작곡가가 된 슈만에게 일대전환기의 해였다. 피아노 독주곡이나 몇 편 쓰고 있던 슈만은 이해에 하이네(Heine)의 시에 작곡한 9곡의 서정가곡집인 ‘리더크라이스(Liederkreis)’, 가곡집 ‘미르테의 꽃(Myrten)’ 등을 비롯한 180곡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작곡을 하였다.

이 중에서 오늘 소개하는 가곡집 ‘미르테의 꽃’는 슈만이 결혼식 전날 밤에 클라라에게 바친 곡인데 모두 26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첫 번째 곡의 제목은 루케르트(Rückert)의 시에 곡을 쓴 ‘헌정(widmung)’이다. 그리고 가곡집 ‘미르테의 꽃’ 중에서 특히 오늘 소개하는 제24곡 ‘그대는 꽃처럼(Du bist wie eine Blume)’은 하이네(Heime)의 시에 곡을 붙였다. 곡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Du bist wie eine Blume
[so hold und schön und rein;]1
ich schau' dich an, und Wehmut
schleicht mir ins Herz hinein.

Mir ist, als ob ich die Hände
aufs Haupt dir legen sollt',
betend, daß [Gott dich]2 erhalte
[so rein und schön und hold.]

너는 한 송이 꽃처럼
그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순결하여,
너를 바라보면 내 마음속으로
슬픔이 살그머니 파고든단다.

너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란다.
하나님이 너를 지켜주시기를,
순 결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도록.

한 편의 영화와도 같았던 그들의 사랑

서양 중세음악사상 가장 아름답고도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남겼던 슈만 부부. 로베르트 슈만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사랑의 감정을 음악적 재능과 문학적 감수성을 살려 아름다운 가곡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평소에 점잖고 말이 없기로 유명한 슈만이 그만큼 불타는 사랑을 했다는 것도 다소 의외지만 게다가 그토록 반대했던 스승의 딸과 사랑을 하였고 기어코 결혼까지 골인했다는 것.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여기에서부터 슈만 부부의 험난했던 사랑이야기를 시간대별로 살펴본다. 그리고 이들의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서 팽생을 짝사랑만 하다 결국 결혼도 못해본 남자, 브람스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한 가지 아쉽고도 의아한 점을 밝혀두자면 모차르트, 베토벤에 대한 일화를 다룬 영화들은 있는데 이처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가지고 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전도유망하지만 가난한 청년과 애틋한 사랑을 나눈 스승의 딸, 스승의 반대를 무릎 쓰고 어렵사리 성공한 결혼. 그들 앞에 나타난 제자. 그리고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하는 애정관계. 모티브만 따와도 충분히 흥미진진한 영화, 드라마가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올해가 슈만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해서 아예 이번 포스트에서 슈만부부의 곡절많았던 사랑이야기를 이해, 분석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글이 많이 길다. 길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20세의 슈만-따님을 사랑하는 게 죄입니까

얽히고 얽힌 삼각관계 그 첫번째. 슈만의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는 이들 부부와 애증으로 뒤섞인 관계였다. 프리드리히는 둘의 결혼을 결사반대하며 슈만을 알콜중독자에 미성년자 유괴죄를 씌워 고소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슈만은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명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열심히 연습했으나 그의 부모는 불안정한 수입의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좋게 말해서 음악가이지 사람들이 몰라주고 일없으면 건달이나 다름 없는 것이 음악가 아니겠나? 그 후 슈만이 청년이 되어 라이프치히 법대에 진학하였으나 죽으나 사나 피아노에만 매달렸고 그곳에서도 피아노 선생을 찾게 되는데 그 선생이 바로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이다. 그리고 슈만은 1830년, 20세가 되던 해부터 비크 선생의 집에서 숙식을 하며 가족처럼 생활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프리드리히의 딸을 보게 되는데 9살 차이의 꼬마 클라라이다. 처음엔 9살 차이 나는 동생 같고 조카 같은 이 꼬마아이를 그저 귀엽게 봐주던 슈만이었으나 이 아이가 나이가 들면서 2차 성징이 지난 후 점점 발육도 좋아지고 얼굴이 펴지기 시작하자 슈만은 점점 회가 동하기 시작한다. 동생 같고 조카 같은 이 꼬마가 소녀시대의 제시카(!)처럼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슈만은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신의 키가 훌쩍 자랐습니다. 나와 함께 놀며 깔깔대던 꼬마아가씨가 아닙니다. 당신은 총명하게 말하며 당신의 눈동자 속에 사랑의 빛이 깊숙이 간직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

점점 클라라를 보며 혼자만의 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슈만. 그의 내성적이고 신중한 성격상 결코 쉽게 사랑을 고백할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클라라 역시 슈만을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결국 두 남녀는 뜨거운 키스를 나누게 되고 키스를 나눈 그 날밤의 흥분상태를 클라라는 이렇게 글로 남겼다. 1835년 11월의 밤에 생긴 일이었다.

‘당신이 처음으로 키스해 주었을 때 정신을 잃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당신의 발 밑을 비춰 주던 등잔불을 간신히 떨어뜨리지 않고 쥐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하지. 16세의 소녀가 첫 키스를 경험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떨렸고 긴장되었겠는가. 슈만이 뛰어난 문학적 감성에서 비롯된 글 솜씨로 클라라에게 밑밥을 던지기 시작했고 클라라가 이를 덥석 물어 두 사람의 감정은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진한 클라라는 완고한 아버지 역시 성실하고 훌륭한 청년 슈만과 자신의 결혼을 승락하여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자~! 그런데 여기에서 꼭지 돌아가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이다. 프리드리히가 보기에 슈만은 피아니스트 지망생이었으나 손가락 힘을 길러보겠다는 뻘짓을 하다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길을 포기한, 무일푼이며 앞으로도 무일푼으로 살아갈 확률이 매우 큰 건달 작곡가 지망생일 뿐이었다. 이에 반해 클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세기에 하나 나올법한 여류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고 있는 천재였다. 애지중지 딸을 키워놨더니 웬 건달 놈이 나타나서, 그것도 믿었던 제자라는 놈이 결혼까지 하겠다고 들이대고 있으니 꼭지가 돌아버릴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프리드리히와 슈만은 돈독한 관계의 사제지간이었으나 여기에서부터 모든 일은 비틀리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는 둘 사이의 결혼을 결사 반대했고 수제자였던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죄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두 년 놈들의 결혼을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까진 볼 수 없다지만 법정공방까지 가야만 했던가.


청년 슈만의 눈에 비친 아름다운 소녀클라라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대략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슈만은 그를 도와주는 절친 멘델스존 등의 도움으로 그렇게 추잡하고도 지리한 법정공방을 끝마칠 수 있었고 1840년 9월 12일, 라이프치히의 교외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프리드리히 비크가 불참한 가운데 그토록 원하던 결혼에 성공한다. 그리고 결혼 전에는 피아노 독주곡, 몇몇 가곡만 작곡했던 슈만은 이해부터 수많은 가곡, 교향곡, 실내악, 모라토리오를 연달아 작곡하며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결혼에 성공한 1840년을 가곡의 해, 이듬해인 1841년은 교향곡의 해, 그리고 1842년은 실내악의 해, 1843년은 모라토리오의 해라고 부른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다 꿈을 접은 작곡가 슈만의 전성기는 이때부터였고 슈만과 클라라는 6명의 자녀를 두고 매우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 14년간이었다.

여기에서 슈만 부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의 이면을 잠깐 살펴볼 필요도 있다. 아버지, 장인이 그토록 반대하는 결혼을 끝내 성공한 두 사람은 일부러라도 행복하게 보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14년의 결혼생활동안 행복하였을까? 우선 그들에겐 경제적 문제가 있었다. 결혼 후 상당기간 동안 슈만부부의 살림은 클라라가 순회공연을 다니며 도맡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클라라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 날이 갈수록 치솟는 인기는 남편인 슈만에게는 심한 자의식을 느끼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슈만의 일자리는 일정치가 않았다. 1835년부터 편집장으로 있었고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던 음악잡지 ‘신음악지(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1844년에 사임하였고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을 비롯하여 멘델스존이 원장으로 있던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교수 자리 역시 얼마 못 가서 그만두었다.

또 하나 그들 부부에게 결정적이고 심각한문제는 바로 슈만의 건강이었다. 슈만은 아주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는데 이 때문에 신경쇠약을 호소하였고 결혼 후엔 매우 심한 청각장애, 그리고 환청증세까지 호소하였다. 결국 슈만의 건강문제 때문에 슈만은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며 요양생활을 해야만 했고 그들 부부의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급속히 불행의 늪 속에 빠져들게 된다. 결혼을 결사 반대했던 슈만의 장인 프리드리히 비크가 왜 그토록 반대했는지 꽤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프리드리히는 슈만의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 그리고 그 성격에서 비롯된 정신착란의 증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런 사내를 애지중지 키운 딸에게 준다면 딸의 결혼생활이 불행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다.

20세의 브람스-사모님을 사랑해도 될까요

얽히고 얽힌 삼각관계 그 두번째. 슈만의 제자인 브람스가 나타나면서 이들의 관계는 묘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클라라와 브람스는 서로의 감정을 조금씩, 조금씩 드러내며 사랑을 나누었고 슈만은 사망하기 직전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클라라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하여 6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로베르토와 클라라 슈만 부부. 1953년 10월 1일, 이들에게 운명의 사내가 나타난다.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온 파릇파릇한 20세의 청년은 슈만부부 앞에서 신기의 솜씨로 피아노를 연주했고 평소에 과묵하고 감정표현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슈만은 그답지 않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브람스 방문(천재)’

흥분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것은 남편뿐이 아니었다. 남편의 호들갑에 불려와 함께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를 감상했던 클라라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神이 이 세상에 보낸 사람 같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후 브람스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슈만의 눈에 확실하게 띄었고 그의 제자가 되기에 이른다. 슈만의 집에서 한 족처럼 지내며 스승과 제자, 그리고 사모님이 함께 음악에 대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여기에서 그들 관계에서 있어선 안될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20세의 청년 브람스가 무려 14년 연상이었고 사모님인 클라라를 사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브람스가 클라라를 얼마나 사모했는지에 대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고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락 거리면서 지나치게 오버된 부분들도 있다. 이를테면 클라라는 슈만과의 사이에서 7명의 자녀를 두었고 브람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6명이었다. 그런데 일곱 번째 막내아들 펠릭스(슈만의 요절한 친구 멘델스존의 이름을 땄다)가 브람스의 아들이란 이야기도 있다. 근데 이건 너무 지나친 오버이고 세 사람의 관계를 3류 치정극으로 만드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나가도 막 나갔다. 그건 완전 뻥이다. 또 하나, 슈만 부부가 침실에 들어 잠자리에 들 때 청년 브람스는 창 밖으로 몰래 그들의 실루엣을 보며 혼자 애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20세 청년 브람스의 눈에 비친 클라라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슈만이 1954년에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정신착란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하였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 즉 알코올 중독의 원인이 브람스와 클라라 사이에서 괴로워하던 슈만이 지나치게 술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은 아니다. 슈만의 집안은 원래 정신병력이 있었다. 슈만의 아버지는 정신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다 세상을 떠났고 누나도 19세에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슈만 역시 20대 초반부터 조금씩 정신착란 증세가 오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슈만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던 그 시절, 그리고 슈만의 사후에 벌어진 청년 브람스와 클라라의 관계가 어느 정도였을까? 어쩌면 실제로 육체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있다. 클라라 역시 6명씩이나 되는 자녀를 낳고 생활 속에 치여 살며 결혼생활에 권태기를 느낄 즈음 나타난 신비로운 음악실력을 지닌 청년 브람스에게 반하고 마음을 열었을 수도 있다. 원래 남녀관계란 아름답고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한 꺼풀 벗겨보면 불륜과 치정의 포르노인 경우가 허다하지 않았나? 어쩌면 클라라와 브람스 사이도 그러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사이에서 존재했던 진실은 그들 외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물며 200여년이 지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아름답지만 불편했던 진실을 꼭 알아야 할 필요까지 있을까? 때론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아름다운 면만을 기억해주고 추한, 추할 수도 있었던 불편한 진실은 눈감아 줄 수 있는 아량(?)도 필요하지 않을까?

마지막. 그리고 그 후

날카로운 청년의 기상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더분한 아저씨가 된 브람스. 그가 수염을 기른 이유는 클라라에게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브람스의 등장 이후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토록금슬 좋은 슈만부부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슈만이 술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졌고 급기야 정신착란을 일으켜 라인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게 된다. 다행히 그곳을 지나가던 어부의 손에 구출되어 살아났지만 슈만은 심각한 정신착란증때문에 엔데니히(Endenich)의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만다.

한편 클라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믿고 의지하는 남편의 투신자살 소동 이후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던 당시 그녀의 뱃속엔 일곱 번째 아들인 펠릭스가 있었다. 결국 브람스의 도움을 받아 그녀는 뒤셀도르프로 이주를 하게 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슈만은 그곳에서 2년의 시간을 지낸 후에서야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그 2년의 시간 동안 클라라는 슈만을 면회하지 않았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뒤셀도르프에서 황급히 엔데니히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했을 당시 슈만은 팔다리를 전혀 쓸 수 없었고 클라라는 슈만과 마지막 포옹을 한다. 그리고 이틀 후, 뜨거웠던 두 사람의 사랑은 이렇게 슬프게 마치게 된다. 1856년 7월 29일의 일이다.

그런데 이상의 일화에서 잘 알려지지 아니한 몇몇 에피소드가 있다. 브람스는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할 즈음, 그리고 클라라가 뒤셀도르프로 이주한 이후부터 더욱더 뜨겁게 클라라를 사모하고 있었다.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보낸 격한 감정의 러브레터를 보면 그 호칭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아주 노골적이고 격렬하게 바뀌고 있다. 처음엔 존경하는 부인, 고귀한 부인에서 시작한 호칭이 사랑하는 여친, 사랑하는 클라라 등으로 바뀌게 된다.

클라라 역시 끝없이 구애를 하는 브람스에게 마음이 움직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슈만이 세상을 떠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면회를 갔던 엔데니히의 정신병원에 클라라는 다른 사람도 아닌 브람스와 함께 갔다. 별다른 저의가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당시 그들의 관계를 알고 의심했던 사람들에겐 더욱 의심을 심화시킬 수 있는 행동임은 분명하다. 게다가 클라라의 브람스에 대한 감정은 슈만 사후엔 더욱 심화되었다. 1858년 브람스와 클라라는 브람스의 절친인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과 함께 괴팅겐으로 가게 된다. 그 곳에서 브람스는 아가테라는 미모의 소프라노 가수를 만나게 되는데 이 여인을 위해 가곡 op. 14, 19, 20을 작곡하고 약혼까지 하게 된다. 이에 큰 질투심을 느낀 클라라가 괴팅겐을 떠나게 되고 브람스는 황급히 파혼을 하였다. 그리고 브람스는 번뜩이는 외모의 청년기를 지나면서부터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중년의 텁텁한 아저씨로 변신하게 되는데 수염을 기른 이유가 클라라에게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다. 슈만 또한 생전에 이들의 미묘한 애정관계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숨을 거두기 직전 ‘나는 알고 있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닿을 듯이, 닿을 듯이 닿지 않았던, 닿을 수 없었던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 이야기는 어떻게 끝났을까? 브람스는 작곡한 모든 곡을 클라라에게 먼저 보여주고 출판을 할 정도로 극진히 존경하고 사랑했다. 클라라는 브람스가 젊은 시절 파혼하게 된 귀책사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편지를 사망하기 3년 전, 그 사건이 일어난 후 35년이 지나서야 브람스의 친구인 요아힘에게 보냈다. 그리고 1895년 가을. 클라라는 뇌졸중으로 사망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되살아났고 클라라 본인도, 브람스도 그녀가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에 브람스는 클라라를 위해 ‘4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änge)’를 작곡하고 그의 생일인 5월 7일에 완성한다. 그리고 클라라는 13일 후인 1896년 5월 20일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클라라가 남긴 유언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죽기 전 남편 로베르트의 곡을 들려달라고 한 클라라는 자신이 죽은 후 로베르트와 함께 묻어줄 것과 자신의 묘비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말라는 것이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빛낸 최고의 비루투오소 중의 하나로 이름을 떨쳤던 클라라였지만 그 자신의 이름보다 로베르트 슈만을 추앙하는 아내로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는 것이 클라라의 유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비석은 로베르트 슈만을 밑에서 올려다보는 클라라의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클라라의 사후 브람스는 어찌 되었을까?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며 위대한 자산이며 고귀한 의미라고 극찬했던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후 브람스 역시 오래 살지 못하였다. 아니, 삶의 의미 자체를 잃고 죽음만을 기다렸던, 삶을 방기(放棄)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1897년 가을부터 간암으로 앓고 투병생활을 하던 브람스는 이듬해인 1897년 4월 3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클라라의 뒤를 이어 따라갔다.

나는 며칠간 슈만-클라라-브람스의 스승과 제자, 그리고 사모님으로 미묘하게 얽힌 애정관계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인간사의 얄궂은 인연이 돌고 돈다는 것이다. 슈만은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스승의 딸을 눈여겨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스승과 법정투쟁까지 하는 어려운 과정 속에서 사랑을 쟁취했지만 훗날 자신이 스승이 되었을 때 그의 제자가 집에 기거하며 사랑하는 아내를 사랑하게 되다는 것.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슈만이 스승인 비크의 집에서 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0세 때였다. 당시 클라라의 나이는 슈만보다 9세 어린 11세. 슈만은 성장하는 클라라를 보며 조금씩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훗날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본 때도 브람스의 나이 20세, 클라라가 34세 때였다. 클라라는 23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20세의 두 남자에게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하였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실력은 당대의 실력자였던 리스트와 견줄만했으며 실제 리스트의 강력한 라이벌이기도 했던 클라라. 너무 뛰어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의 삶이란 알고 보면 꼭 부러워할만한 것도 아닌, 팔자가 셀 수도 있다는 결과론적인 결론도 도출된다.

셋째,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느꼈던 사랑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환경과도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브람스의 부모는 나이차가 17살이나 되며 어머니가 연상이다. 44세의 어머니가 브람스를 낳은 것이다. 브람스는 어린 시절부터 사랑하는 남녀관계란 나이 많고 푸근한 누나, 어머니 같은 여자가 젊고 팔팔한 청년을 어르고 감싸 안아주는 것 정도로 생각하며 성장하였을 것이다. 17세 차이 나는 부모의 사랑을 보며 큰 브람스가 14세 연상의 스승의 아내에게 사랑을 느꼈다는 것.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에 대하여


피셔-디스카우는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거장 중의 거장이며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독일의 바리토너이다. 내 블로그에서도 이미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그리고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에서 피셔-디스카우가 함께 녹음에참여한 음반을 소개한 적이 있으나 수많은 관현악과 합창의 목소리에 묻혀 제대로 된 피셔-디스카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번 포스트에서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슈베르트, 슈만 등의 독일 가곡이라고 하면 맨 먼저 떠올릴 수 있는 테너는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프리츠 분덜리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다음 페터 슈라이어가 위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프라노하면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바리톤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피셔-디스카우의 이름을 맨 처음 떠올릴 수밖에 없다.

내 블로그에 오랜 시간 동안 방문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클래식 음악에서 내가 거의 듣지도 않고 잘 모르는 분야가 실내악과 성악이다. 실내악 중 특히 무슨 3중주, 4중주, 5중주 이쪽은 거의 듣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알고 싶지 않다. 그리고 성악 중 리트(lied)는 거의 듣지 않는 편인데 예외적으로 프리츠 분덜리히의 감미로운, 사전적 의미나 단순한 수사가 아닌 진정 감미로운 목소리의 음반이 딱 하나 있고 그담에 슈만의 가곡 중 피셔-디스카우의 애절한 목소리의 음반이 딱 하나 있다. 그만큼 피셔-디스카우에 대해선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데 이런 거장 중의 거장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것은 불경스럽다고 생각되니 피셔-디스카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분은 다른 웹사이트를 통해 알아보는 게 좋을 듯 하다.

어~ 근데 내가 이 피셔-디스카우의 음반을 갖고 있는 이유가 있고 이 음반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블로그에 소개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헌정(widmung)’을 들으며 이 곡을 설명해주는 과정에서 슈만처럼 슬쩍 밑밥을 던지는 식의 프로포즈를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성공하면 블로그에 올릴까 생각 중이었는데…

미처 그 날이 오기도 전에 오픈하고 말았다. 쩝~!


Dietrich Fischer-Dieskau
Christoph Eschenbach (Piano)
녹음: 1975 Stereo, Analog
장소: 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