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PIN: Polonaises (Vladimir Horowitz)

모스크바에서의 공연을 기사화 한 TIME 誌. Triumph in Moscow 라고 표현했다.냉전시대의 해빙무드가조성된 이 시대에개최된 이 역사적인 공연에 꼭 Triumph 라는 표현까지 써야 했을까?
호로비츠란 피아니스트가 그의 나이 80이 넘어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조국인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공연을 하였는데 당시의 이 공연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Horowitz in Moscow' 라는 제목의 음반과 DVD로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이 공연실황 중에서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연주하는 모습의 동영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공연은 단순히 노년의 한 위대한 피아니스트의 공연이라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이 공연이 전세계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는지에 대해 알아보려면 호로비츠라는 피아니스트가 살았던 삶의 행적, 그리고 냉전시대의 대표 강국인 미국과 소련의 문화전쟁의 배경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생애
호로비츠는 1904년 우크라이나 생이다. 그의 집안은 매우 부유했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아마 그는 어머니의 뛰어난 재주를 물려받았나 보다.
호로비츠는 3살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6세때부터 정규교육을 받았는데 이미 그 나이에도 천재성은 돋보였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그의 집안은 완존히 거덜나게 된다. 그저 취미삼아 뚱땅거렸던 피아노가 생존의 목적이 되었고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 후 향후 8년 동안 러시아 순회공연을 통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25년, 베를린 데뷔로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그의 존재를 보이게 되었고 그 유명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대타로 공연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무시무시한 연주는 경악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된다.
1927년, 드디어 호로비츠는 미국으로 상륙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그의 성공신화는 쭈욱 이어진다. 미국에서의 연주 역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었다. 당시 문화의 불모지였던 ‘신세계’ 미국은 러시아에서 건너 온 호로비츠라는 엄청난 문화상품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숨이 막힐듯한 초인적 기교, 압도적인 강철터치의 이 무시무시한 연주에 미국 전역은 경악하였고 호로비츠는 미국에서 전설을 써내려간다. 이때 당대 최고의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를 만나게 되고 그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엄청난 재능에 고급 문화예술에 목말라 하던 미국이란 나라의 시대적 배경, 그리고 토스카니니의 사위가 되는 인적 네트워크까지 합쳐져 거칠 것 없는 호로비츠의 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호로비츠와 그의 아내 완다 토스카니니. 아버지의 얼굴을 닮아서 그런지 강렬하면서도 무섭게 생겼다. -_-;
호로비츠와 장인 아르투르 토스카니니. 훗날 호로비츠는 사망 후에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서 그의 장인과 함께 묻히게 된다.
이후 호로비츠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며 미국 전역을 돌면서 연주를 강행한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 육체적, 정신적 피로와 건강상의 이유로 수차례에 걸쳐 은퇴와 복귀를 번복한다. 비록 은퇴와 번복을 계속 하였으나 그의 레코딩이 아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적게는 1년, 많게는 3~4년간의 갭이 있었으나 그는 끊임없이 레코딩 작업을 하였다.
은퇴와 복귀를 번복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몸값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상술, 뻥카였을까? -_-? 아니면 정신적, 육체적 피로에 의한 매너리즘과 자신의 한계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예술가들에게 나타나는 괴벽증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도 있다. 호로비츠는 비행기에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를 갖고 다니면서 연주회를 했었고 (-_-;) 전속 요리사와 생수기까지 순회공연에 함께 가지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 소련제 미국 피아니스트
냉전체제를 대표하는 양대강국인 미국과 소련은 국방, 과학, 경제, 문화, 체육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우주선 발사도 그랬고 올림픽 종목에서 소련과 미국의 1, 2위 다툼이 항상 그랬다. 음악 또한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많은 예술가들을 정책적 선전용으로 서방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하이페츠와 함께 세계 바이올린계를 양분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강철타건의 대명사 에밀 길렐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명지휘자 에브게니 므라빈스키, 첼로의 로스트로포비치 등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여 서방세계에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며 전세계적인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소련의 훌륭한 예술가들에 비해 미국은 전쟁의포화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동구권 예술가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라흐마니노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하이페츠, 피아니스트 제르킨, 루벤스타인 지휘자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정도였다.
미국으로선 자국에서 탄생한 예술가들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 보다는 동구권에서 망명한 예술가들이 미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안전한 비호를 받으며 뛰어난 예술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호로비츠였다.
호로비츠는 러시아 태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니 소련군부의 입장으로 보았을 땐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이나미국의 입장으로 보면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알리는데 이보다 더 좋은 선전효과용 예술가는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산 원석. 미국으로 와서 세계 제일의 보석이 되다. 바로 이런 이미지, 선전용 문구가 가능하다.
러시아에서 태어났지만 러시아가 싫어 미국으로 온 사람. 그리고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우수한 에술정신을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사람. 미국으로 봐선 환상의 꽃놀이 패인 것이다.
- 역사적인 모스크바에서의 공연

말년의 호로비츠. 80이 넘은 나이에도 이 할아버지는 엄청난 활동들을 하였다. 호로비츠의 뒤로 보이는 벽에 걸린 사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호로비츠의 음악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인 토스카니니와 라흐마니노프이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집권 이후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급격한 개혁과 개방의 물결을 맞게 되고 서방세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해빙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6년엔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힘입어 드디어 호로비츠의 역사적인 귀향 연주가 성사될 수 있었다.
60여년만의 귀향.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양 강대국에서 태어났고 성장하고 성공하여 불세출의 신화를 창조했던 80세 노년의 피아니스트의 역사적인 공연. 이 공연은 예술적인 평가를 떠나 지극히 감동적일 수밖에 없는 공연이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바로 반세기를 통해 계속 되어야 했던 이념간의 갈등이 빚어낸 냉전체제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역사적인 순간의 시초가 되기 때문인 것이다. 영화 쉬리에 나오는 대사처럼 오욕의 세월은 가라~ 분단과 질시의 세월도 가라~ 의 분위기가 된 것이다. -_-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를 연주하는 모습. 매우 숙연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역사적인 공연에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도중에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노신사의 모습도 보인다.
이 동영상을 보면 관중석에 있는 한 노년신사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랄지 모든 관중들이 황홀경에 빠져들어 이 구부정한 할아버지의 연주를 지켜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호로비츠의 얼굴과 손가락을 풀샷으로 잡아주며 고도의 집중력으로 건반을 내리칠 때의 질감을 영상으로 잘 담아냈다. 이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대단히 편집이 잘 된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이날의 공연 실황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울컥 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공연을 마치고 3년 후에 거장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 CHOPIN: Polonaises
호로비츠는 쇼팽의 폴로네이즈를 모두 7번에 걸쳐 레코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연주하는 폴로네이즈가 최고의 연주로 평가를 받느냐 하면 그건 글쎄?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쇼팽의 스페셜리스트는 크게 세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폴리니, 루빈스타인, 아쉬케나지이다. 그 외에 호로비츠와 아르헤리치를 더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폴로네이즈는 호로비츠가 평생을 두고 즐겨했던 레퍼토리였고 80세를 훌쩍 넘긴 노년의 피아니스트에게서 저런 정력적인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롭게 느껴질 뿐이다.
호로비츠의 이 역사적인 연주를 동영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사실. 참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입가에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경험이라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