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 Symphony No. 6 in B minor op. 74 `Pathetique`(W. Furtwangler)

sniper 2011. 7. 25. 20:04

차이코프스키의 장례식. 국장(國葬)으로 치뤄진 이 장례식 날엔 하늘도 울었고 땅도 울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삶은 이 성대한 장례식만큼 화려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TCHAIKOVSKY: Symphony No. 6 in B minor op. 74 "Pathetique"(W. Furtwangler)

러시아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가 남긴 가장 위대한 걸작 ‘비창’교향곡을 오랜만에 감상한다. 내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당시에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 첼리비다케-뮌헨 필의 음반을 두 번에 걸쳐 올린 적도 있지만! 그 당시엔 블로그가 뭔지도 잘 몰랐던 시절이라서 뭔가가 부족해도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예전에 써놓은 글, 세련되지 못한 당시의 글을 다시 읽어보면 쪽팔려서 얼굴이 화끈거리기 마련이다. 귀찮아서 링크는 걸어놓지 않을 테니 감상하고 싶은 분은 교향곡-차이코프스키 카테고리에 들어가서 직접 감상해보시길.

난 특히 이 곡의 아름다운 2악장을 들을 때마다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예전에 어떤 인텔리 여성이 어느 칵테일 바에서 한 신사를 알게 되었는데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른 벌건 얼굴로 이 곡의 2악장을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내 후배와 술을 마시면서 이 에피소드를 안주삼아 이야기 한 적 있는데

“그 여자가 그렇게 그 남자에게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럼 난? 난 이 곡의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다 따라 부를 수 있는데 왜 여자가 없는 걸까?”
“형님. 그건 그 남자가 액면가로 다 갖춘 상태인데 그 곡까지 따라 부르니까 거기에 옵션으로 반한 거 아닐까요? 형님이 그 곡을 다 따라부른다고 해서...이렇게 맨날 저랑 둘이서 술이나 마시고 계시는데 언제 여자를 사귀겠습니까?”
“그런가? 알았다. 술이나 마시자...”

이랬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아~! 이런 정직한 새끼.

꽤 의외인 음반을 하나 택해봤다. 구 소련을 위시한 빨갱이 나라의 지휘자들-므라빈스키, 콘드라쉰, 스베틀라노프, 게르기에프, 잔데를링-의 음반이 아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옛날 음반으로 골라봤다. 독일이 배출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칭송받는 그 푸영감이 남긴 차이코프스키의 비창도 있었고 그것도 아주 대단한 명반으로 평가 받았다는 과거사 또한 알아두면서 감상해보시길. 음질은 개판이지만 왜 푸영감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푸덕후들을 거느리고 있는지에 대한 작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차이코프스키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이 걸작 교향곡에 대한 좀 더 긴 이야기를 차이코프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느껴야 했던 처절했던 고통, 절망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해본다. 오늘도 그렇지만 글이 꽤 길다. 지루하고 피곤하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시는 분들 덕에 내가 더 열심히 블로그에 글 올리는 거. 다들 아시겠지? 오늘도 정독과 완독을 부탁 드린다.

살아서는 고통. 죽어서야 영광


위대한 음악가의 인생을 살펴보면 살아생전에도 온갖 영광을 누렸다가 세상을 떠날 까지도 많은 이들의 애도속에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있는 반면 살아서도 비참했고 죽는 순간까지 너무도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많았다. 로시니, 리스트, 베르디, 생상스, 드보르작, 시벨리우스 등의 작곡가는 살아생전 국민작곡가로 온갖 영광과 호사를 다 누렸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수많은 인파의 애도 속에 행복한 이별을 맞이할 수 있었다. 반면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등은 살아서도 가난과 불행 속에서 신음하다가 이른 나이에 요절했고 죽은 후에서야 인정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작곡가들이다. 하지만 두 가지로 대별될 수 없는 또 한 부류의 삶과 죽음이 있다. 살아 있을 땐 많은 이의 존경을 받고 유명세를 누렸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큰 아픔을 겪어야 했고 죽음마저도 불행했던 경우이다. 러시아가 배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삶이 바로 그랬다. 차이코프스키의 많은 작품 중 당대에 인정을 못받은 작품들도 많이 있었지만 사망하기 1년 전에 작곡한 호두까기 인형이 크나큰 성공을 거두며 국민적인 인기를 누렸고 그의 인기는 러시아를 벗어나 전 유럽, 미국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가 사망했을 땐 제국교회 성가대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국장(國葬)이 거행되었고 온 거리는 추모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추모사를 낭독한 러시아 황제는 ‘러시아엔 많은 귀족이 있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단 한 사람 뿐’이었다는 명문을 남기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비창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한 후 9일 후에 사망했다. 초연 당시의 반응은 의외로 너무 좋지 않았고 이에 차이코프스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의연한 자세를 견지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초연 후 9일 후 사망한 다음 다시 열린 연주회에서는 차이코프스키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또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 사람. 과연 얼마나 잘 살았기에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이 정도의 대단한 추모사를 황제에게서 받은 사람의 삶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삶은 너무도 우울했고 그 우울함의 원인이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기에 더더욱 그를 옭아매는 질곡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너무도 심각한 동성애자였고 자신의 동성애적 기질을 치료해보고자 별라별 짓을 다해봤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홀로 외롭고 승산없는 싸움을 하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여자는 싫다. 남자가 좋다. 어쩌란 말인가!

차이코프스키의 가족. 맨 왼쪽의 꼬마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그 옆은 그의 엄마. 엄마에 대한 비정상적이고 지나친 집착이 그가 평생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탄광도시 보틴스크에서 수석 광산검열관의 아버지에게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의 성격은 매우 신경질적이고 명상적이며 내성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대한 비정상적이고 과도한 애정을 품고 있었는데 열 살 때 법률학교에 입학, 기숙생이 되어 어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순간까지도 떠나가는 마차 바퀴에 몸을 던져 다칠 정도로 심각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차이코프스키가 14세 때 콜레라로 사망하게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전기작가들은 차이코프스키를 평생 동안 지배한 동성애적 기질이 이런 어머니에 대한 과도하고 비정상적인 사랑, 그리고 이별의 충격에 의한 것으로 이 때 차이코프스키의 여성에 대한 사랑은 아예 차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걸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적 전문용어로 뭐라고 설명해주면 내 블로그가 더 있어 보일텐데 난 거기까진 잘 모르고 어쨌든 어릴적부터 결코! 범상치 않은 정신세계와 경험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그의 동성애적 기질, 우울증의 시발점인 것으로 보고 있다.

동성애적 기질을 떨쳐버리기 위해 별별 짓을 다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중 가장 큰 무리수는 결혼이었다. 37세의 나이에 음악학교 학생이던 20세의 꽃다운 처녀와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류코바(Antonina Ivanovna Miliukova)와 결혼한 것이다. 이 결혼 역시 심상치 않은 것이었는데 미모의 여인이 차이코프스키에게 자살 협박조의 편지까지 보내며 기어이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에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까지 고백했으나 막무가내로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김태희가 호미 들고 밭일하고 한예슬이 화장실 청소한다는데. 그토록 미인이 많은 러시아에서도 안토니나라는 젊은 여인은 흑백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히 미인이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에게 안토니나는 좌절과 절망만 안겨준 불행의 메신저였다.


여성에게서 전혀 사랑을 느낄 수 없었기에 결혼은 애초부터 잘못임을 알고 있는 차이코프스키. 결혼 당일 밤에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순간에 흐느낌으로 목이 메었다는 편지를 동생에게도 남겼을 정도로 결혼이 그에게 주는 공포, 자책을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모스크바 강에 투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지만 차이코프스키는 법률적으로는 이혼하지 않았다.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이 세상에 공개되기 무서웠기 때문이다. 생활비를 보조하는 조건으로 안토니나와 사실상의 이혼을 하였고 이후 안토니나는 차이코프스키에게서 돈 받아 이놈 저놈하고 연애질하고 다니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두 사람의 불행은 보다 강하게 결혼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차이코프스키에게 귀책사유가 있음은 분명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일생에 단 하나의 여인이라면 그의 돈줄, 스폰서 역할을 자처했던 나데즈나 폰 메크(Nadezhda von Meck) 부인이었다. 12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남편의 유산으로 엄청난 부를 소유한 미망인이었다. 처음엔 차이코프스키의 팬이었던 그녀가 작곡의뢰를 한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었고 이후 14년간 무려 1100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멘토-멘티, 아이돌-빠순이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차이코프스키와 1100통의 편지를 교환하면서도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던 폰 메크 여사. 의도와 결말이 어쨌든 이 여인과 교환했던 서신은 차이코프스키를 연구하는 아주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 또한 비정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두 사람은 편지로 서로의 솔직한 감정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벗이었지만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할 때에도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게 스케줄을 조정하였고 차이코프스키가 폰 메크 부인의 저택에 머물 때에도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하였다. 딱 한 번 시골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차이코프스키가 잠시 멍때리고 있다가 모자를 벗어 정중하게 인사하고 각자 갈 길을 갔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작곡활동으로 명성을 얻은 때가 바로 이 시기였고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넉넉한 경제적 후원 덕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도 그만두고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또한 폰 메크 부인과 주고받은 1100통의 편지엔 작곡방법, 배경 등의 상세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어서 차이코프스키를 연구하는 아주 유용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1890년, 폰 메크 부인은 파산 직전이라 더 이상의 후원을 해줄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고 차이코프스키와의 관계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이에 차이코프스키는 크게 낙담하였다. 사실 차이코프스키에게 경제적 후원 같은 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그는 전 유럽, 미국에 그 명성이 떨치고 있었고 충분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순회 공연 땐 밴드가 호텔 창 아래서 세레나데를 연주하였고 음악계의 고위층 인사들도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숙녀들은 그가 절할 때 무대 위에 꽃다발을 던지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때문에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절교선언은 그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주었고 더 이상 어느 누구와도 정신적인 교감을 이룰 수 없다는 외로움에서 오는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폰 메크 부인과의 이별 이후 안 그래도 우울하고 정신적으로 뒤죽박죽인 인생이 더욱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지고 말았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의미 없는 도피성 여행만을 다닐 뿐이었다. 그 기간이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하기 전까지의 약 3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 없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금 심신을 다스리기 위해 생의 마지막 힘을 다한 작품이 생애 최후, 최고의 걸작인 ‘비창’ 교향곡이다.

의문의 죽음-끝없는 속박 끝에 얻은 영원한 자유

차이코프스키가 생의 마지막에 머물렀던 집. Klin에 있고 현재는 차이코프스키 박물관이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마지막이 될 6번 교향곡을 심혈을 기울여 완성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이 이토록 훌륭한 작품을 창조할 줄 몰랐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결국 1893년 10월 28일 걸작 ‘비창’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음악협회에 의해 시즌의 개막공연으로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초연되었으나 그의 의지와는 반대로 전혀 인기를 끌 수 없었다. 하지만 차이코프스키 본인도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예견했고 세간의 혹평에 애써 담담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 교향곡이 성공할 것이란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1893년 11월 6일.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성공할 것이라 확신했던 그 작곡가는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그 작품이 마지막일 것이라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고 초연 후 9일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제서야 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은 국장(國葬)을 치루며 떠나간 위대한 작곡가의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다시 열린 공연장에서 울려퍼진 ‘비창’을 들으며 흐느끼며 눈물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동성애와 애정결핍, 좌절, 정신착란, 자살충동, 세간의 혹평 등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위대한 작곡가는 결국 죽음으로서 영원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죽음과 더불어 양대 미스터리로 꼽히는 차이코프스키의 직접적인 사인은 콜레라였다. 당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콜레라가 한창 창궐하고 있었는데 끓이지 않는 물을 마신 차이코프스키가 콜레라 균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차이코프스키의 유해는 사망 직후 그의 동생 집에 안치되어 있었고 수 백 명의 조문객이 방을 출입하여 떠나는 그를 애도하며 손과 이마에 입맞춤을 했지만 전염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당시 콜레라 감염에 관한 위생법규는 매우 엄격해서 시 당국의 감독하게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1978년에 새롭게 공개된 사실에 의하면 어느 귀족이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조카와 동생애 관계를 하고 있음을 규탄하는 편지를 황제에게 전해달라고 니콜라이 야코비에게 건냈다. 야코비는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법률학교 출신이었고 이에 격분, 황제에게 전하는 대신 학교시절 차이코프스키를 알았던 6명을 포함하여 명예법정이란 것을 소집, 차이코프스키를 소환했다. 다섯 시간의 토의 끝에 차이코프스키에게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차이코프스키는 이에 복종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명예법정에 소환된 날은 1893년 10월 31일, 사망 6일 전이었고 차이코프스키는 비소를 복용하여 ‘강요된 명예자살’로 그의 삶을 끝마쳤다는 것이다. 이 또한 그의 사후 80여년 이 흐른 후에 밝혀진 기록에 의한 설일 뿐이지 진실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 하나의 설은 동성애자 단체에게 피살당했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로 밝혀지면 다른 동성애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으므로 한 사람 독박 쓰는 걸로 조용히 끝냈다는 이야긴데 이 또한 그럴 듯 하긴 하다.

또 하나의 의문점이 있다. 폰 메크 부인은 왜 차이코프스키를 그토록 외면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죽을 때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애증이 뒤섞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파산 직전이라 경제적 후원이 어렵다는 편지를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재정적 어려움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격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쥐락펴락 갖고 놀았던 까닭이 뭘까? 이 또한 정확한 까닭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폰 메크 부인이 심한 신경병을 앓고 있어서 화답하지 못했다는 것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녀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비스바덴의 한 병원에서 1894년 1월, 차이코프스키 사후 석 달을 더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푸르트벵글러와 차이코프스키

푸르트벵글러의 10CD 모음 음반.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으니 하나쯤 구입하면 좋을 음반이다. 음질은 물론 아주 좋지 않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라고 하면 독일은 대표하는 3명의 ‘ㅂ’으로 시작하는 작곡가-베토벤, 바그너, 브람스-의 곡을 해석하는데 최고봉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차이코프스키를 위시한 많은 외국의 작곡가들, 그리고 현대 음악까지도 관심 있게 다루었다. 사실 푸르트벵글러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때문에 그 어떤 음반도 일단은 다 질러놓고 보자는 매니어들도 많고(예전에 내가 그랬다) 그 중에선 실망할만한 음반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건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모든 음반이 다 명반이라고 이야기할 순 결코 없겠지만 대다수는 명반이며 그 중 의외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또한 대단한 명연, 명반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차이코프스키의 후기 3대 교향곡을 모두 녹음했다. 이 중 6번 ‘비창’은 1938년과 1951년에 두 번에 걸쳐 녹음했고 오늘 소개하는 1938년 녹음은 1961년 에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역사적인 음반이 나오기 전까지 빌름 멩겔베르크의 음반과 함께 최고 명반 대열에 있었다. 지금 연세 지긋하신 60~70대 어르신들 중에 클래식 음악 매니아라면 아마 1938년 음반을 소장하고 있는 분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음질은 물론 무척 좋지 않다.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2악장의 구성도 별로이고 1악장과 3악장에선 역시! 이 영감님!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4악장에선 왜 이 곡의 제목이 무려 ‘비창’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들려주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명박 므라빈스키 때문이라고 탓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므라빈스키 영감님이 역사적인 음반을 남겼기 때문에, 아니 남겨주신 덕분에 그 전, 후 세대의 음반들은 죄다 올킬이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저 이 곡을 독일의 푸영감님이 꽤 좋은 해석을 들려준 음반도 남겼다는 것, 독일의 지휘자는 ‘비창’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ps 1) 푸르트벵글러의 주특기는 뭐니뭐니해도 베토벤 교향곡이었다. 특히 홀수번호-3, 5, 7, 9-에 있어서는 지금껏 푸르트벵글러를 신앙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닐 정도이다. 그에 반해 므라빈스키의 주특기는 당연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이다. 내 블로그에 이미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올린 적이 있으니 오늘 올리는 푸르트벵글러-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의 조합과 비교 감상하면 재밌는 감상포인트가 될 것 같다. 뭐랄까? 지휘자끼리의 스와핑(conducting swapping) 정도로 표현하고 싶은데 고상한 클래식 음악에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되면 더 좋은 아이디어 내주시길 바란다.

ps 2)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은 3악장에서 피날레 분위기의 신나는 연주가 펼쳐진다. 이때 3악장이 끝나고 나서 감격에 벅차 기립박수를 쳤다가는 옷 잘 빼입고 공연장 갔다가 개망신 당할 수 있으니 특별히 주의를 요한다. 이어지는 4악장이야말로 이 곡이 왜 ‘비창’이란 이름을 지었는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답이기 때문이다. 이 곡을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한 사전지식 테스트용으로 3악장 끝나고 박수를 치는지 4악장까지 기다리는지 보면 알 수 있다.

ps 3) 내 후배와 내가 술 마시며 나눈 대화의 원본을 공개하자면 대충 이렇다.

“야. 알고 보면 여자 하나 후리는 거 조또 아닌 거야. 그렇지 않냐? 니미. 술 처먹고 그거 2악장 쪼가리 하나 따라 불렀다고 헬렐레~ 정신줄 놓고 말야. 근데 그렇게 말하면 나는 그거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다 따라 부를 수 있는데 왜 난 여자는 안 꼬이는 거여? 씨팔. 사람 열 뻗치게”
“아! 형님. 그건 형님 생각이 핀트가 안 맞은 거라니까. 아! 씨팔 막말로 말이에요.그년도 눈까리에 좆박은 것도 아니고 그 놈이 딱 생긴 거부터 와꾸가 되 먹었는데 거기에 클래식 음악까지 씨부렁대니까 거기에 확 간 거에요. 어떤 미친년이 생긴 건 조또 아닌 새끼가 클래식 음악 좀 따라 부른다고 막 대주겠어요? 아~! 씨팔. 이래서 우리 형님이 아직 여자가 없다니까”
“아! 씨팔 아름다운 새끼. 이 새끼는 다 좋은데 너무 솔직한 게 더 맘에 들어. 술이나 처마셔 새꺄”

내가...이래서 음악방송을 하고 싶어하는 거다. 이런 욕지거리는 블로그에 써봐야 아무런 감흥도 전달이 되지 않으니까.

ps 4) 파란 블로그에서 음악파일 올리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며칠 전 개편한 서비스는 너무 큰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오늘 올리는 포스팅은 여러 어려움 끝에 올렸다는 것, 알려드리고 싶다. 아...진짜 짜증이 이빠이다.

개인 서버를 구입해야겠는데 여기에 대한 좋은 정보 있는, 유경험자 분들의 도움 부탁드린다. 이대로 파란 블로그를 그만 두기엔 내가 여기에 쏟아부은 정성이 너무 넘친다. 그래서 개인 서버에 음악을 올려놓고 여기에 링크를 할 계획이다.

Wilhelm Furtwangler (conductor)
Berliner Philharmoniker
녹음: 1938/10 Mono
장소: Berlin


전악장 연속재생

1악장 Adagio-Allegro non troppo

2악장 Allegro con grazia

3악장 Allegro molto vivace

4악장 Finale. Adagio lamento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