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DEREWSKI: Minuet in G major op. 14-1
피아니스트, 작곡가, 애국지사, 정치인으로 살며 모든 영광과 고통을 조국과 함께 하며 살았던 이그나치 얀 파데레브스키. 그의 이름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미래형이기도 하다.
PADEREWSKI: Minuet in G major op. 14-1
19세기와 20세기를 살았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작곡가, 애국자였던 이그나치 얀 파데레브스키가 남긴 미뉴엣 G장조는 어린 피아니스트 지망생에겐 피아니스트로 성공할 재목인지의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곡이다. 쉽지도 어렵지도 않은 아름답고 화려한 멜로디가 이어진다. 20세기 중반이 넘어서부터 이 곡에 대한 관심도, 일세를 풍미했던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파데레브스키도 옛 명인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36년의 치욕스러운 식민역사를 간직하고 있기에 한국인들에겐 더욱 알아두어야 할 피아니스트 파데레브스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 역시 가져보겠다. 같은 한국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지만 애국애족의 명제는 언제나 참이며 국적과 시공을 불문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조국해방 66주년을 맞아 위대한 음악가의 업적을 다시 한 번 기려보며 지금 이 순간, 이 나라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 또한 냉철하게 되돌아봐야겠다.
난세에 태어난 영웅, 쇼팽의 환생
프레드릭 쇼팽. 쇼팽이란 이름은 프랑스식이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가 폴란드인이었다. 쇼팽은 21살에 모국 폴란드를 떠나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 살았지만 한 번도 폴란드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어 쇼팽보다 폴란드어 발음인 호핀으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피아노 위엔 폴란드에서 퍼온 흙을 담은 병이 있었고 요절한 후 몸은 프랑스에 묻혔지만 심장만큼은 유언에 따라 모국 폴란드에 묻혔다. 쇼팽은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애국자였고 모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으나 결국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영광된 모국의 모습을 못보고 세상을 떠났다.
쇼팽의 심장이 뛰고 있는 성 십자가 교회(Holy Cross Church). 몸은 아버지의 나라에, 하지만 심장만큼은 어머니의 나라에. 쇼팽의 유언이었다.
쇼팽이 세상을 떠난지 11년 후인 1860년. 폴란드에서 또 하나의 위대한 음악가가 탄생한다. 러시아 통치하에 있던 쿠릴로브카에서 태어난 그는 81년을 살며 가장 위대한 쇼팽의 연주자, 위대한 독립운동가, 애국자로 살았다. 쇼팽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조국의 독립을 그의 손으로 이끌어 냈으며 그의 명성은 전 세계에 퍼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폴란드의 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의 유해가 조국에 도착했을 때 학교는 휴교했고 상인들은 자진휴업을 하며 그를 맞이했다. 살아생전 연주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렸으나 오로지 조국의 영광된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진정한 애국자였다. 지금까지도 폴란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그 이름. 바로 이그나치 얀 파데레브스키이다.
피아노치는 대통령이란 영화도 있듯이 사람들은 국가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서 권위주의 일색의 모습뿐만이 아닌 낭만적인 모습도 찾으려 한다. 최고 권력자이지만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사소한 일로 고민도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찾아 친근함과 동질감을 찾으려 하는 의도일 것이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그나치 얀 파데레브스키는 영화가 아닌 실제로 존재했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모습 그 자체였다. 연주자로서의 명성은 유럽을 넘어 미국에까지 신드롬을 일으켰고 그에 대해 혹평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명성을 뛰어넘는 연주자는 없었다.
파데레브스키는 1860년 11월 18일 러시아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 쿠릴로브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 배웠지만 체계적 교육은 받지 못했고 작곡 쪽에 오히려 관심.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쇼팽의 대가 율리우스 야노타를 사사했고 18세에 음악원을 졸업한 뒤 모교의 피아노 선생으로 재직하다가 빈에서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였던 레세티츠키를 찾아가 오디션을 본다. 하지만 레세티츠키는 그에 대해 혹평하면서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파데레브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 선천적 재능은 부족했다. 하지만 레세티츠키를 찾아가 끈질기게 제자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여 결국 그의 제자가 되었다. 제자가 되어 레세티츠키의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 대가로서의 발돋움을 할 수 있었다. 훗날 파데레브스키는 24년간 배운 내용보다 훨씬 많은 것을 몇 번의 레슨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회고했다.
최강 피아니스트-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붉은 머리를 휘날리던 젊은 시절의 모습. 파데레브스키의 인기는 신드롬이었고 사회현상이었다. 특히 아줌마와 소녀떼에게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파데레브스키는 1887년 빈에서 데뷔하였고 파리, 런던, 뉴욕, 유럽 등지의 순회공연이 크게 성공하며 인기 급상승하였다. 1913년엔 미국으로 가서 더더욱 큰 성공을 거두었고 당대 최고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만이 그의 명성과 비교할 정도였다.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려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어떤 소녀는 그에게 세 장의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다. 한 장은 액자에, 또 한 장은 피아노 안쪽에, 또 한 장은 품속에 간직하기 위해 세 장의 사인을 해달라고 한 것이다. 또한 그가 미쿡에서 연주여행을 다니는데 페데레브스키를 위한 최고급 전용 열차를 타고 다니며 피아노 조율사, 의사, 안마사, 요리사, 집사, 하인을 대동했다. 미국에서만 15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열었고 연주회마다 청중이 꽉꽉 매우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새로 만든 카네기홀에서 솔로 리사이틀을 가진 최초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당시 청중은 3천명에 육박하였다.
뿐만 아니다. 카네기홀에서 연주회가 열리고 또 다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는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공연되었는데 양쪽 공연장 모두 매진되었다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0-1930년대 자녀를 피아노 교육시키는 부모의 소망 중 한가지는 언젠가 자녀가 피아니스트로 성장하여 연주회에서 파데레브스키가 작곡한 미뉴엣을 멋있게 연주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구름처럼 몰려드는 아줌마와 소녀떼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일단 외모부터 날카롭지만 수려한 외모에 패션감각도 있어서 붉은 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연주를 했고 롱코트를 입고 다녔다. 때문에 그의 외모를 따라 하는 패션이 크게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본딴 각종 캐릭터 상품까지 쏟아져 나와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페데레브스키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믿기 힘든 일화들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조국이 부른다면. 조국을 위해서라면
나는 정치인이다. 연주자로서의 안정된 삶을 모조리 내던지고 오로지 조국을 위해 변신한 파데레브스키. 조금만 더 현실을 외면했다면, 조금만 더 이기적이었다면 그는 훨씬 더 편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연주자로서 더 이상 누릴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파데레브스키. 하지만 1차 대전은 그에게 안락한 연주자로서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파데레브스키는 리사이틀때마다 고국의 독립을 호소했고 300회가 넘는 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모금활동을 하였고 전 재산을 털어 2만 명의 폴란드 의용군을 조직하며 조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정상에 있던 정치가들의 친분도 있었고 적극적인 정치행보로 인해 폴란드의 국립위원회의 일원이 되었고, 위원회의 대표로 임명되어서 정치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1차 세계 대전의 종전 회담에 폴란드 대표로 출석하여 폴란드 독립을 지지하도록 윌슨 대통령을 설득한다. 그 결과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에 14개 조항의 평화원칙을 발표했고 그 중 13번째 항에 폴란드의 재건, 독립을 언급, 이로서 폴란드 국민이 그토록 원했던 독립을 이끌어내는데 파데레브스키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파데레브스키가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있었던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와의 미담 또한 아직까지 전해진다. 후버가 스탠포드에서 공부하던 시절,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초청 연주회를 개최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던 파데레브스키를 초청한 것이다. 후버는 파데레브스키에게 2000불의 개런티를 약속하였으나 아쉽게도 1600불밖에 수입을 올리지 못하자 후버는 400불을 훗날 변제하겠다는 차용증을 써서 파데레브스키에게 전했다. 하지만 잘나가던 파데레브스키에겐 2000불도, 400불도 껌 값도 안 되는 돈이었다. 학생들이 기특하게만 보였던 파데레브스키는 차용증을 그냥 찢어버리고 1600불마저 돌려주고 나서
‘이 돈은 학생들이 꼭 필요할 텐데 그냥 이 돈은 학생들 공부 열심히 하는데 쓰게’
하고 한껏 가오를 잡으며 가진 자의 아량을 베풀었던 것이다. 먼 훗날, 파데레브스키가 대통령이 되어 조국 폴란드의 식량원조를 받기 위해 발바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닐 때 원조요청도 하지 않았던 미국에서 대량의 식량이 도착하였다. 파데레브스키로서는 백골난망할 지경. 파데레브스키는 파리에 방문 중인 미국의 대통령을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그러자 미국 대통령은
‘천만에요. 식량이 필요하실 텐데 좋은데 쓰십시오. 근데 저 기억 안나요?’ 예전에 1600불 돌려주시면서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 때 그 스탠포드의 학생 후버가 미국 대통령이 되어 헐벗고 굶주린 파데레브스키의 조국에 크나큰 도움을 준 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니 여기저기 내가 힘닿는 한 그래도 남들 도와주면서 관대하게 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만일 그때 파데레브스키가 돈 몇 푼 때문에 추접스럽게 굴었다면 어땠을까?
허버트 후버를 비롯한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함께한 파데레브스키. 이 둘의 소름돋는 인연을 보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도 관대하고 너그럽게 해야 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독립 후 파데레브스키는 새로운 폴란드 정권의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취임하여 쇼팽도 살아생전에 보지 못했던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였고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1년 만에 총리직을 그만 두고 자신의 본업인 피아니스트로 1923년에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 영국 영화 [월광곡]에 출연할 때까지 연주활동을 지속해나간다. 그리고 연주회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해방조국의 재건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액 기부하였다. 또한 전쟁 희생자를 위한 연주회를 많이 개최했고 폴란드 구호기금을 마련한 미국인들에게 보답하는 연주회, 미국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속출하자 실업자들을 위해 식량구매를 위한 기금마련 연주회 역시 개최하며 정치적 연주활동의 행보를 계속하였다. 그 외에도 그가 개최한 자선공연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영국의 음악 실업자를 위한 연주회, 이태리 전쟁 고아를 위한 기금 모금을 위한 연주회, 미국 상이군인을 위한 연주회, 그리고 벨기에의 군비축소반대를 위한 자선음악회에는 파데레브스키가 등장하자 국왕부부가 청중들과 함께 기립박수로 환영하기도 하였다.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파데레브스키가 남긴 대다수의 음반은 바로 이 시기에 녹음한 것들이며 정치활동을 하기 전인 전성기 시절의 연주에 비해 많이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끝내 보지 못한 조국의 두 번째영광
1941년 6월 22일에 미국 뉴저지에서 열린 가두연설회에서의 모습. 그의 마지막 연설이었다. 이날의 폭염을 이기지 못한 파데레브스키는 결국 쓰러지고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난다.
다시 본업에 충실하고자 마음 먹었던 파데레브스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은 그를 또다시 내버려두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발발하여 폴란드가 나치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자 즉각 분기했고 프랑스 파리의 망명 폴란드 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하지만 1941년 6월의 무더운 어느 날,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중 몸에 지쳐 쓰러졌다. 그토록 조국의 독립을 위해 80이 넘은 고령에도 동분서주하였으나 이번에는 끝내 영광된 조국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1941년 6월 29일, 뉴욕에서 빛나는 생을 마감하였다. 미국은 전직 대통령의 신분을 고려하여 그의 시신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였고 미국 정부에서는 미국 대통령의 장례식에만 사용하는 포고를 울리며 그를 애도했다. 그의 장례식장 안엔 4500명, 장례식장 밖엔 35000명이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였고 수많은 정치가, 문화예술가들이 모여 그를 추모했다.
알링턴 국립묘지로 향하는 파데레브스키의 유해. 미국 정부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미국 대통령 서거 때에만 울려주는 포고를 울려주는 배려를 베풀어주었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브스키는 살아있는 피아니스트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극작가 버나드 쇼우의 말이다. 그는 연주자로서 상상할 수 있는 극한의 부귀영화를 세계적으로 누렸으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다. 연주자였지만 조국을 생각하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애국자였고 정치인으로 탈바꿈하여 시대가 원하는 존경 받는 지도자상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훗날 1993년 구소련이 붕괴되고 폴란드의 독립이 이루어지자 그의 유해를 조국 폴란드에 다시 안장. 그의 유해가 폴란드에 도착하자 온 국민이 눈물바다였고 학교는 임시 휴교, 상가, 극장가, 유흥업소는 모두 자진 휴업했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 퍼진 폴란드 이민자 후예 단체들은 파데레브스키라는 이름을 넣어 단체명을 짓는다. 그의 이름을 딴 파데레브스키 콩쿨까지 제정하였고 1961년 시작해 3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
이처럼 파데레브스키는 실천하는, 행동하는 애국이 무엇인지 보여준 진정한 애국지사였고 그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위대한 피아니스트, 위대한 정치가로 기억되고 있다. 내 몸은 프랑스에 묻더라도 나의 심장만큼은 어머니의 나라 폴란드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쇼팽. 그 쇼팽마저도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룬 파데레브스키. 두 사람은 부귀영화의 극을 누렸던 음악가였지만 너무도 애절하게 조국을 생각하고 걱정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밝은 빛보다는 그토록 사랑한 조국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더 길고 어둡게 느껴지는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았다. 어쩌면 파데레브스키는 젊은 쇼팽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태어난 쇼팽의 환생이 아니었을까?
파데레브스키가 남긴 음악
헐리우드에서도 먹어주는 파데레브스키의 위엄(top). 파데레브스키의 이름과 사진을 넣어서 판매하고 있는 보드카(bottom).
마지막으로 파데레브스키가 남긴 음악에 대해 알아본다. 파데레브스키는 당대 최고의 쇼팽 해석가로 알려져 있지만 바흐부터 베토벤,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못 다루는 레퍼토리가 없었다. 게다가 작곡에도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2편의 오페라, 교향곡 1곡, 2곡의 협주곡, 그리고 실내악과 가곡, 피아노 독주곡도 많이 남겼다.
파데레브스키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명성과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에게 혹평을 내리는 평론가들도 많았다. 예를 들면 프랑스 원로 지휘자 마누엘 로장탈은 ‘피아노를 친다고는 생각하지만 평판대로의 파데레브스키는 아니었다’ 라고 혹평했고 독일의 대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라이제나우어 ‘그는 무엇이든 모르는 게 없다. 단, 음악만 빼고’ 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혹평을 쏟았던 이들은 파데레브스키의 스승인 라세티츠키의 대척점에 있던 리스트의 제자들이란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지며 그에 대한 혹평은 그저 혹평을 위한 혹평이란 점에서 평가절하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파데레브스키는 연주자로서 누릴 수 있는 극한의 부귀영화를 모두 누렸기에 누구의 혹평 정도로 흠집을 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예로 뉴먼이란 음악평론가가 남긴 말이 있다. 대 피아니스트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어떤 어려운 곡도 쉽게 연주하는 사람, 또 하나는 기교를 초월하여 청중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람. 파데레브스키는 두 번째 종류에 속한다고 했다. 그만큼 그 어떤 기교상의 실수, 미스터치 등의 사소한 흠집 정도로는 파데레브스키라는 대 피아니스트의 명성에 잔기스 하나 낼 수 없을 정도였다는 말이다.
파데레브스키는 어릴 적 스승에게서 기교가 부족하다, 기본이 안돼있다는 꾸중을 들으며 자신을 연마했고 때문에 재능이라는 측면에서는 동료들보다 떨어졌지만 강인한 의지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며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의 세월을 보냈다. 기품이 있고 관대함이 있으며 카리스마, 쇼맨십으로 청중을 압도했던 연주자, 그리고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조국의 독립에 그의 운명을 맡겼다. 때론 음악가로, 때론 애국심이 넘치는 정치가로 고통스럽지만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던 파데레브스키. 그가 살았던 19세기와 20세기를 넘어 그가 사망한지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시점에서도 그의 이름은 빛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지금 이 세상에서 파데레브스키처럼 사리사욕에 초월하여 헌신적인, 진정한 애국자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녹음: unknown
장소: unkn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