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PIN: 12 Etudes op. 25-11(Winter Wind)
세한도. 추운 겨울이 와야 송백(松柏)의 푸르름을 안다고 하였다. 못났어도 끝까지 나를 지켜줄 사람이 누군지, 그래도 의리와 지조가 있는 이가 누군지는 없어봐야 알 수 있다는 뜻. 이렇게 빈틈이 많게 보이는 한 폭의 그림에도 추사 김정희는 그만의 깊은 철학, 사상을 주입시켰던 것이다.
CHOPIN: 12 Etudes op. 25-11(Winter Wind)
쇼팽을 두고 피아노의 음유시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쇼팽만큼 한 대의 피아노로 그토록 다양한 예술적, 문학적, 철학적 사상을 체화시킨작곡가가 없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쇼팽이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과 이후의 그 어떤 작곡가를 비교해도 그렇다. 단 한 대의 피아노만으로 말이다. 특히 다른 곡도 아닌 피아니스트의 기교연마를 위한 연습곡에까지 그토록 깊은 예술과 철학을 주입시킨 작곡가는 쇼팽만이 전무후무하다.
내 블로그에서도 쇼팽의 연습곡은 몇 번에 걸쳐서 잠깐씩 소개한 적이 있다. 이별의 곡이라 부르는 10-3, 그리고 혁명이라 부르는 10-12를 소개한 적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찾아서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오늘은 찬바람도 슬슬 불어오고 길가에 돕바입고 오뎅과 핫도그를 파는 아줌마의 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추게 되는 겨울이 시작되는 철을 맞아(내일 11월 7일이 벌써 절기상으로 입동이라고 하지 않은가?) 쇼팽의 연습곡 24곡 중 겨울바람이라는 차가운 느낌의 곡을 한 번 감상해보겠다. 한 대의 피아노로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바람의 차가운 감촉과 귓전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 가히 쇼팽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막감에 휩싸인 어느 벌판. 그리고 이어지는 매서운 한 겨울의 칼바람. 그리고 그에 맞서는 한 인간의 처연한 초상. 한 대의 피아노로 한 편의 시와 그림이 연상되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오~ 달리 쇼팽이 아니라니깐.
게다가 요즘 이 곡이 쇼팽의 수많은 곡 중에서 다시금 큰 인기를 끌며 뜨고 있다. 화제의 드라마인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이 곡이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 강마에가 옛 시절을 회상하며 쇼팽 콩쿨에서 박력있게 연주했던 곡도 이 곡이며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홀로 야심한 시각에 연주하는 곡도 이 곡이다.
그 외에 쇼팽의 연습곡이 왜 만들어졌는지, op. 10과 25는 또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구를 위해 헌정되었는지 등등의 정보는 수없이 많이 떠다니는 이너넷의 정보를 잘 활용하시길 바란다. 내 블로그에선 여러 연주자의 다양한 감상으로 똑같은 곡을 이토록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느껴보시기 바란다.
쇼팽의 달인 프랑소와, 폴리니, 아쉬케나지의 연주와 더불어 러시아 피아니스트 중 가장 쇼팽을 잘 연주하기로 소문난, 하지만 실력에 비해 명성은 덜 알려진 피아니스트인 슈라 체르카스키,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연주와 달리 설명할 필요 없는 그 사람.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까지 모두 6인의 연주로 감상하겠다. 난 특히 소콜로프의 빈틈없는 환상적인연주에 그야말로 뻑이 갔다.
* 특히 체르카스키와 소콜로프의 연주를 주목해서 감상하기시 바란다. 언젠가 때가 되면 체르카스키의 쇼팽 녹턴, 그리고 소콜로프의 쇼팽 작품을 소개하면서 이들에 대한 길다란 설명을 덧붙일 시간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에 앞서 맛뵈기로 이들이 연주하는 쇼팽 연습곡의 극히 일부만을 감상해보시기 바란다.또한 엄청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대표적인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이들과 함께 라자르 베르만이란 사람이 있다. 언젠가 꼭 이들에 대해 한 번쯤 짚고 넘어갈 계획이다.
1. 슈라 체르카스키(Shura Cherkassky)
체르카스키에 대해 여기에선 긴 설명을 붙이진 않겠다. 언젠가 그에 대한 연주를 소개하며 길게 설명할 날이 있기 때문이다.
슈라 체르카스키는 이 시대의 마지막, 진정한낭만주의 피아니스트로 평가받았던 명인이다. 오이스트라흐, 밀스타인, 길렐스 등과 같은 우크라이나의 오데사 출신으로미쿡에서 활동하며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 피아니스트이지만 녹음을 무척 싫어해서 그가 남긴 음반수가 많지 않고 또한 딸깍발이 기질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저평가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많지 않은 음반들을 들어보면 정말 입에서 살살 녹는 것과 같은 달콤한 아이스크림같은 연주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루빈스타인, 호로비츠, 폴리니, 아쉬케나지, 프랑소와 등등 난다긴다하는 쇼팽의 스페셜리스트들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낭만의 쇼팽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다면 체르카스키의 연주를 꼭 한 번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특히 가장 추천하고 싶은 연주가 있다면 녹턴이다.
Shura Cherkassky, piano
녹음: 1953/05&09, 1954/01&11, 1955/04 Mono
장소: unknown
2. 상송 프랑소와(Samson Francois)
알프레도 코르토, 디누 리파티의 뒤를 이어 프랑스피아니스트 중 가장 쇼팽다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 그 이름 상송 프랑소와. 와인을 즐겼고 시가를 즐겼으며 망토를 걸치고 다니는 것을 그토록 좋아했다던, 그렇게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한 세상을 살다간 프랑소와. 그의 쇼팽이 모두 압축된 이 음반엔 당연히 연습곡도 수록되어 있다.
Samson Francois (piano)
녹음: 1959/09 & 10 Mono
장소: Salle de la Mutualite, Paris
3.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Vladimir Ashkenazy)
언젠가부터 피아니스트로의 활동은 접었고 지휘자로만 활동하고 있는 아쉬케나지. 하지만 많은 팬들은 그가 들려주었던 생동감넘치고 매혹적인 쇼팽의 선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진짜 자연스럽고 물흐르는 듯한 쇼팽의 선율을 따라 부르고 싶은가? 그렇다면 아쉬케나지가 연주하는 쇼팽의 왈츠를 한 번 감상해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연습곡과 전주곡을 들어보기 바란다.
아~! 또 한가지. 아쉬케나지는 제5회 쇼팽 콩쿨에 출전하여 2위를 차지한 경력이 있다. 그 전의 4회 콩쿨까진모두 소련사람이 우승을 하여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던 쇼팽의 나라 폴란드에서 출전한 아담 하르세비치란 피아니스트가 아쉬케나지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었다. 당시 심사위원 중의 하나였던 이탈리아의 베네딧트 미켈란젤리는 1위와 2위가 뒤바뀌었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화로도 유명하다. 그 후의 행적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르세비치는 그 후 흔적없이 사라졌고 아쉬케나지는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마에스트로의 반열에 올랐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만큼 아쉬케나지는 쇼팽을 가장 잘 연주하는 대명사 중의 한명이고 그가 남긴 연습곡 전곡 음반은 폴리니의 것과 더불어 가장 많은 추천을 받는 음반이다.
Vladimir Ashkenazy
녹음: 1971/05 Stereo, Analog
장소: Kingsway Hall, London & the London Opera Centre
4.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사상 첫 만장일치의 쇼팽 콩쿨 우승자. 우리 중에 저만큼 쇼팽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을까? 라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콩쿨 심사위원들에게 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쇼팽 연습곡을 연주하기 위해, 혹은 감상하기 위해 딱 하나의 음반만 소개해달라고 추천을 부탁받는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이 음반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그만큼 쇼팽 연습곡의 대명사와도 같은 음반이다. 딱딱 끊어치는 차가운 맛과 함께 아~ 이렇게 정확하게 연주를 할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단, 약간은 차가운 느낌이 귀에 거슬린다면 체르카스키, 아쉬케나지의 음반이 좀 더 감상하기 편할 것이다.
Maurizio Pollini
녹음: 1972/05 Stereo, Analog
장소: Herkulessaal, Residenz, Munich
5.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
참 많이도 울궈먹었던 음반인데 오랜만에 또 나왔다. 리히터의 전성기 시절을 담은 프라하 공연실황 15장 음반이다. 여러 작곡가의 여러 곡을 많이 연주했던 음반답게 쇼팽 연습곡 또한 함께 수록되어 있다.
달리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리히터의 연주라면 쇼팽도 끝내준다.
Sviatoslav Richter
녹음: 1988/07/15-20 Stereo, Analog
장소: Czech Radio Broadcasts
6. 그리고리 소콜로프(Grigory Sokolov)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리히터, 길렐스, 아쉬케나지, 그리고 가브릴로프와 포고렐리치 등의 소련 피아니스트에 비해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고 저평가를 받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그리고리 소콜로프이다. 한 명을 더한다면 앞서 언급한 슈라 체르카스키, 그리고 또 한 명을 더한다면 라자르 베르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길렐스의 힘, 그리고 아쉬케나지의 낭만성을 모두 갖춘 흔치 않은 피아니스트인 소콜로프는 1966년에 열린 차이코프스키 콩쿨에 출전하여 사상 첫 만장일치로 우승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그러나 이후 활동이 대단히 뜸했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천천히 그의 활동영역을 넓혀가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다. 그가 연주하는 겨울바람을 감상해보시라. 진짜 매서운 칼바람이 귓전을 때리고 폐부 깊숙이 찌르는 듯한 느낌마저 들 것이다. 이 연주를 듣고 난 진정한 겨울바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Grigory Sokolov
녹음: 1985/06/13 Stereo, Digital
장소: Glinka Chapel, St Petersbu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