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Sonata No. 29 in B 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빌헬름 켐프. 정통 독일음악을 계승했던 위대한 피아니스트.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활약하며 피아니스트,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교육자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수많은 업적 중 상당수는그의 나이 50이 훨씬 넘어서부터 시작되었다.
BEETHOVEN: Piano Sonata No. 29 in B flat major op. 106 "Hammerklavier"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소나타 중 가장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서사시 함머클라비어를 소개한다. 이 곡은 베토벤 스스로가 아주 작정을 하고 제대로 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해보겠다고 1년이 넘는 긴 시간에 걸쳐 덤벼들었던 대곡 중의 대곡이다. 피아노 소나타 28번 (op. 101)을 작곡한 1816년 이후 3년이 지난 후인 1819년 3월에 완성되었을 만큼 그는 이 기간 동안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지 않았고 그만큼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수없이 생각하고 갈등하며 고뇌하였다.
이 곡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아주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귓병이 몹시 악화된 상태였고 조카 칼의 양육권을 놓고 소송도 한참 진행 중에 있었다. 대작 9번 교향곡의 작곡에 한참 열중하던 때이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작곡된 곡이기에 베토벤 스스로 ‘현재의 상황에 맞서고자 작곡했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칼 체르니. 베토벤의 제자였고 프란츠 리스트의 스승이었던, 그리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수많은 어린이들의 피아노 스승이기도 한 인물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할 당시 얼마나 작정하고 덤벼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제자였던 칼 체르니에게서 들을 수 있다. 베토벤은 체르니와 산책 중에 ‘나는 지금 가장 위대한 소나타가 될 작품을 쓰고 있다’라며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이 곡에 베토벤은 자신의 힘든 상황과 처절했던 심경을 그대로 전사하여 예술적 정열을 쏟아부었다. 무려 4악장이나 되는 대규모의, 하나의 교향곡에 견줄만한 함버클라비어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이 곡의 이름인 함머클라비어는 망치(Hammer)와 건반악기(Klavier)의 합성어이다. 이는 이태리어 피아노포르테(pianoforte)를 독일어로 그대로 옮긴 것으로 베토벤이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이 곡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베토벤은 이 곡을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소나타 중 기교적으로 가장 어렵고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곡이다. 작곡가 스스로가 무척 어려운 곡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이고 향후 50년이 지나서야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다. 압도적인 타건의 1악장을 넘어 2악장에서는 짧고 간결하게 연주하는 스케르초 악장이 이어지고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3악장, 그리고 서정성과 강렬함의 4악장이 계속 이어진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 널리 알려진 작품들-비창, 월광, 템페스트, 발트슈타인-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처음 접하기엔 상당히 어려운 곡이다. 이는 감상자나 연주자 모두 마찬가지다. 연주자 입장에서도 이 곡은 정말 연주하기 어렵기로 소문난 곡인데 곡의 심오한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조적으로도 무려 4악장, 40분이 넘는 대곡이고 기교상으로도 매우 어렵다. 그런 고로 난다긴다 하는 피아니스트에게도 이 곡의 연주, 녹음은 다른 피아노 소나타 곡을 먼저 녹음한 뒤로 미루는 경우가 많은데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빌헬름 박하우스 역시 두 번째 피아노 소나타 전집 녹음 중 이 곡만을 미뤄놓았다가 결국 녹음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 외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분은 네이버 캐스팅이란 곳에서도 이미 자세하게 설명해 놓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오늘은 이 대곡을 가장 인간답게, 피아니스트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거장 중의 거장 빌헬름 켐프의 연주로 감상하겠다. 그리고 빌헬름 켐프에 대한 좀 긴 설명을 덧붙이겠다. 정통 독일 음악을 계승한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칭송 받는 그 이름, 바로 그 빌헬름 켐프이다.
빌헬름 켐프-최강 2인자

빌헬름 켐프와 그의 제자 이딜 비레트. 비레트는 스승을 많이 존경하였고 스승이 작곡한 피아노 곡을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하였다.
20세기를 살았던 대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는 피아니스트임과 동시에 명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작곡가이기도 했고 교육자로서의 열정과 명성 또한 대단했던,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 중의 거장의 삶을 누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피아니스트로서의 기교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평을 항상 달고 살았고 동시대를 함께 활약한 1인자 빌헬름 박하우스의 그늘에 가려 2인자의 칭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2인자의 삶에서 1인자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여러 조건들이 있으니 첫째, 오래 살며 오래 활약하는 것과 둘째, 1인자가 하지 못한 틈새분야까지 인정받을만한 활약을 펼치는 것인데 그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아주 훌륭하게 만족시키며 모두에게 존경 받는 대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정통 독일음악의 가장 훌륭한 계승자로 지금껏 칭송 받는 그 이름, 바로 빌헬름 켐프이다.
빌헬름 켐프는 1895년에 태어나 1981년까지, 96년을 살았다. 그토록 장수하면서 그는 수많은 연주회를 다녔고 수많은 음반을 남겼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음악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다 누리며 살았다. 그가 얼마나 존경과 사랑을 받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켐프는 1936년부터 1979년까지 열 번에 걸쳐 일본에서 공연을 가졌다. 일본인들은 그를 무척 좋아해서 작은 섬 하나를 아예 그의 이름을 본떠 ‘Kempu-san (켐프씨)’로 짓기도 했다. 지구반대편에 사는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 그만큼의 존경과 사랑을 표했다는 것. 이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또 하나. 작곡가 시벨리우스는 켐프의 절친이기도 했는데 그에게 오늘 소개하는 곡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해달라고 부탁한다. 켐프의 연주를 다 듣고 난 시벨리우스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한 인간의 연주’였다며 감동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켐프는 호로비츠, 리히터, 길렐스 등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교로 대표되는 동구권 피아니스트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리고 같은 독일출신에 같은 시대를 활약했던 빌헬름 박하우스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하며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오늘은 켐프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의 인생에 대해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수많은 천재 음악가들의 삶 중에서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바로 켐프라는 것이다. 사실 어릴 적부터 세상을 놀라게 할 천재소리를 듣고 살았던 수많은 음악가들의 삶에서 내가 닮고 싶은, 닮을 수 있는 부분은 없겠으나 이 빌헬름 켐프의 삶은 왠지 많이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로 첫째, 그는 천재였으나 의외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고 빛을 보지 못했으나 끊임없이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연마해서 기어코 인정받아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는 점이며 둘째, 그는 천재였음에도 항상 노력하고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야 감히 빌헬름 켐프와 같은 천재의 발끝도 못 따라갈 범부 중의 범부이겠지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삶의 자세, 철학만큼은 꼭 배우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음악-그냥 팔자이자 운명
20초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음악가들의 스승이었던 알프레드 코르토와 아는체하는 켐프. 켐프의 인맥은 음악가 외에도 무척 넓었으며 많은 이들이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켐프는 1895년에 베를린 근처의 위터보그 (Jüterbog)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음악가를 배출했는데 할아버지가 오르가니스트, 아버지는 오르가니스트임과 동시에 성가대의 지휘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2살 위의 형 게오르그 역시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리고 켐프 역시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켐프에게는 좋은 스승복도 있었는데 로베르트 칸 (Robert Kahn)에게서 작곡을,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스승이기도 했던 칼 하인리히 바르트 (Karl Heinrich Barth)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이렇게 켐프는 작곡과 피아노, 오르간까지 함께 배우며 어린 시절에 이미 천재성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12세에 피아니스트로 데뷔를 했고 작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17세 때에 편곡의 황제였던 부조니 앞에서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해 보이며 부조니의 인정을 받아 부조니의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여기에서 잠깐. 칼 하인리히 바르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은 19세기의 명 지휘자였던 한스 폰 뵐로 (스승인 바그너에게 아내를 빼앗긴)의 제자였다. 그리고 한스 폰 뵐로는 프란츠 리스트 (바그너와 눈맞아 도망간 딸년의 아버지)의 사위이자 제자였고 리스트는 칼 체르니의 제자였다. 그리고 칼 체르니는 앞서 언급한 베토벤의 제자였으니 베토벤에서 이어지는 위대한 독일 음악의 전통이 훗날 체르니-리스트-뵐로-하인리히 바르트-켐프에게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켐프는 자신이 독일음악의 전통을 이어받은 적자라는 점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켐프는 1916년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게 되는데 작곡과 피아노 부문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며 최고의 연예인 멘델스존 상을 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이후 켐프는 피아노와 오르간 연주자, 그리고 작곡가로서도 활동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후진양성에도 몸담게 된다. 1924년부터 5년간 슈트르가르트의 뷔뎀베르크 국립음악대학의 학장직도 맡았다. 그 후 전 세계를 누비며 수많은 연주회를 다니며 자신의 명성을, 더 나아가 베토벤에서부터 이어지는 독일 음악의 위대함을 알리는데 힘썼다.
많은 연주회를 다니면서 많은 에피소드도 남겼다. 그가 전 세계를 누비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존경했다는 이야기들인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일본에서는 그의 명성을 기리기 위해 작은 섬 하나를 ‘kempu-san’이라고 명명하기도 했고 터키의 대통령, 그리고 훗날 미쿡 대통령이 되는 로널드 레이건 또한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친분을 청할 정도로 음악인 외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야야야~! 인생, 환갑부터야!
이름도 같고 옆모습도 비슷한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나란히 피아노 앞에 앉은 켐프. 푸영감은 켐프가 작곡한 곡들을 많이 초연하였다.
연주자, 지휘자에게 호랑이의 가죽보다 더 중요한 평생의 업적, 사후에까지 남게 될 중요한 업적이라면 단연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반 녹음일 것이다. 물론 음반녹음을 사무치게 싫어했던 클리포드 커즌, 세르주 첼리비다케,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의 경우도 있지만 후세의 사람들에게까지 음악성을 평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그의 이름, 그의 얼굴을 표지에 내세운 음반이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는 이 켐프는 이 음반 녹음을 상당히 늦은 나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꽤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 켐프는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고 베를린 음대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많은 연주회를 다녔고 많은 명성을 쌓았으나 음반 녹음에서만큼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켐프가 그토록 사랑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의 전곡녹음을 56세에 시작하였고 수많은 독주곡, 협주곡, 실내악 등도 모두 1950년대, 그러니까 그의 나이 55세가 넘은 나이에서부터 시작하였다. 물론 1930년대에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협주곡 등을 녹음하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기획음반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켐프가 처음으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1951년, 그의 나이 56세 때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고 정리하고자 자서전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자서전을 쓰던 그 해에 그는 역사적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하였고 기교적으로 불안하다는 세간의 평을 완전히 불식시키며 최고의 베토벤 해석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으니 이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가만히 보면 인생이 참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인생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그 시점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뒤늦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에게도 켐프의 인생에서 좋은 교훈을 얻어가시기 바란다. 늦었다고도 생각하지도 말고 자신의 능력이 보잘것없다고 자책하지도 말 것이며 절망에 빠져서도 안될 것이다. 혹시 아나? 설령 내 인생이 희망이 안 보인다고 한들 소녀시대의 제시카같은 딸 하나 잘 키우면 자식 덕에 팔자 고칠 수도 있지 않겠나? 둘러보면 연예인 자식 둬서 팔자고친 부모들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남의 인생을 함부로 말해서도 안되고 내 인생을 함부로 단정지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켐프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름마저도 같아서 항상 비교되었던 피아니스트가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빌헬름 박하우스이다. 박하우스와 켐프는 11살 차이였고 같은 독일 출신이며 정통 독일음악의 계승자라는 각광을 받은 것마저도 똑같다. 그러나 박하우스의 그늘에 가려 켐프는 항상 2인자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박하우스와는 차별화된, 박하우스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켐프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연주 장르를 들 수 있다. 박하우스가 독주곡, 협주곡 외에 별다른 연주를 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켐프는 실내악 반주 음반도 많이 남겼다. 또 하나, 필생의 역작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세 번이나 녹음한 것도 박하우스보다 더 큰 업적이다. 작곡과 오르간 연주에도 뛰어났고 교육자로서의 활약도 대단했다는 점 역시 박하우스가 가지지 못했던 켐프만의 업적이었다.
1950년대, 그의 나이 50이 훌쩍 넘어 환갑이 다 되었을 때부터 켐프는 역사적인 음반들을 녹음하기 시작하였다. 피아니스트에겐 필생의 역작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무려 세 번이나 녹음하였고 바흐,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쇼팽, 리스트, 브람스의 수많은 곡을 녹음하였다. 그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
1980년, 켐프의 나이 85세에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 2권을 녹음하였고 이는 그의 마지막 음반녹음이 되었다. 1981년엔 두 번째 자서전을 출간하였고 (한 번뿐인 인생에서 두 번이나 자서전을 출간한 행운아라니!) 마지막 연주회를 갖게 된다. 당시 그는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었다. 1986년에 평생을 함께 살았던 부인을 먼저 떠나 보낸 후 5년을 더 살다가 1991년 5월 23일, 심장마비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켐프는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사람이었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 사람들은 이 말을 떠올릴 때 ↓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진짜 의미를 아는 사람은 다르게 생각한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 ↙ 이렇게 파들어가서 결국엔 ↓ 이렇게 narrow down되는 과정인 것이다. 켐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피아니스트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5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부족한 기교, 2인자 등 달갑지 않은 평가들이 많았으나 이를 모두 극복하기까지 꾸준히 노력했다. 그 노력의 세월 동안 그는 최고의 연주자가 되기 위한 수많은 과정을 거쳤다. 오르가니스트, 작곡가, 그리고 교육자로서 활동하였고 인문학, 역사, 철학에도 정통하여 그의 제자들은 그의 깊은 철학과 해박한 지식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주변의 모든 지식과 철학을 하나로 수렴하여 결국 ↓ 이렇게 narrow down하여 50이 넘어서야 최고가 된 연주자. 그는 진정한 피아니스트임과 동시에 후세의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준 인생과 음악의 참 교육자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의 인생을 반의 반이라도 좋으니 꼭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켐프의 반의 반이라도 닮아서 훗날 나의 후학들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 겸손함, 전인적 교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사~알짝 해봤다.
켐프가 남긴 음악-인간의 연주
노년의 켐프가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의 1악장. 차분하고 사색적인 연주이다. 켐프의 연주는 이처럼 서두르지 않고압도적인 기교를 뽐내지도 않는다.
켐프는 동시대를 살았던 연주자들에 비해 기교면에서 완벽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고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권의 비루투오소가 활개치던 그 시절의 유행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었다. 켐프는 연주에서 과장된 표현을 싫어했고 섬세함과 단순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켐프에 대해 써놓은 여러 평론들을 보면 일관되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완벽한 기교를 내세우는 연주자가 아니었다는 것.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는 것. 이 두 가지이다. 그러나 켐프에게는 질식할 것 같은 기교로 압도하는 피아니스트가 가질 수 없었던 중요한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인간미를 가진, 가장 인간다운 피아니스트였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켐프에게 함버클라비어의 느린 악장을 연주해달라고 요청한 후 켐프의 연주를 모두 듣고 나자 ‘연주자가 아닌 인간의 연주 (You did not play that as a pianist but rather as a human being)였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켐프는 바흐-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슈만-브람스로 이어지는 독일 작곡가의 곡을 주로 연주하여 녹음하였다. 여기에 헨델, 쇼팽, 리스트 등의 작품도 조금은 들어가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연주한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바흐부터 브람스로 이어지는 독일 정통음악이었다. 특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세 번에 걸쳐 전곡 녹음을 했는데 맨 처음 녹음했던 것은 LP 이전의 쉘레크 음반에 녹음한 것이고 1951년부터 1956년까지의 모노 녹음, 그리고 1964년에서 1965년까지의 스테레오 녹음이 진정한 전곡녹음이라고 할 수 있다.
켐프의 전곡 녹음에서 또 하나 주목할 작곡가의 음악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이다. 일전에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을 소개하면서 잠깐 언급했지만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연주회용으로 주로 주목을 받을 뿐이지 감상용으로는 그다지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곡이다. 그 곡을 켐프가 처음으로 전곡녹음을 하였고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사랑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실내악 음반도 녹음했다. 이 역시 주로 베토벤에 편중되었는데 볼프강 슈나이더한과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녹음했고, 에후디 메뉴인과도 함께 녹음하였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도 파블로 카잘스, 피에르 푸르니에와 함께 녹음하였는데 특히 피에르 푸르니에와 함께 녹음한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 음반은 시대를 초월한 명반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그의 나이 50이 넘어 환갑에 가까울 때 즈음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래, 오래 살며 세간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한 우물을 꾸준히 파면서 기어코 1인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대단한 업적들이었다.
작곡가로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알려진 작품은 거의 없지만 켐프는 사실 여러 장르의 곡을 작곡하였다. 피아노 독주곡, 실내악, 성악곡, 교향곡에 오페라까지 두루 작곡하였고 바흐의 작품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4번까지의 카텐짜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딜 비레트 (İdil Biret)라는 그의 제자가 그가 남긴 피아노 곡을 음반으로 남겼고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그가 작곡한 교향곡 2번을 비롯한 관현악곡의 초연을 맡았다.
꾸준함, 한 우물이 빌헬름 켐프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가 오로지 노랑딱지 회사 DG와 계약을 맺고 무려 60년간 녹음한 것 또한 꾸준함을 설명하는 역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켐프는 80세의 나이에 DG에서 골든디스크 상을 받게 된다. 그가 녹음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25만장이 팔린 것을 기념하여 감사의 의미로 DG에서 거장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1981년에는 Deutsche Schallplattenpreis (독일 레코드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함머클라비어의 명반
거장 빌헬름 켐프의 세 번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 사색하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 담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의 걸작 중 하나이다. 켐프는 이 음반을 그의 나이 70세에 녹음하였다.
함머클라비어는 이 곡을 쓴 베토벤이 어렵게 쓰려고 작정을 한 곡이니만큼 젊은 초짜 연주자들에겐 연주, 녹음하기 매우 기피하는 곡으로 유명하다. 이 곡을 연주해서 세상에 내놓은 순간부터 그 옛날을 살았던 증조부, 고조부격인 전설과의 일대일 비교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곡의 잘된 명반은 주로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살았던 전설들의 음반들이 꼽힌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명반은 뭐니뭐니해도 에밀 길렐스의 DG 음반일 것이다. 강철처럼 내리찍는 압도적인 1악장과 2악장, 그리고 이 곡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서정적이면서도 비장미를 살려야 하는 3악장, 4악장에서까지 에밀 길렐스는 능수능란하게 탈바꿈을 하며 그야말로 완벽한 연주를 들려준다. 압도적인 연주라면 길렐스의 친구였던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내 블로그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소개한 적 있는 프라하 실황 음반이 매우 유명한 명연주로 꼽힌다.
두 사람의 소련 피아니스트 외에 독일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박하우스의 음반을 빼놓을 수 없다. 길렐스, 리히터 등 소련 피아니스트와는 달리 천천히, 하나하나 벽돌을 올려 큰 성을 완성해가는 구조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피아니스트 스테판 코바세비치는 함머클라비어를 가장 완벽하게 이해하는 피아니스트는 바로 빌헬름 박하우스 뿐이라고 극찬하였다.
오늘 소개하는 또 하나의 거장 중의 거장, 빌헬름 켐프의 연주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명연에 속한다. 큰 그림을 그리며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여야 하는 대곡이니만큼 그의 템포는 느리지만 정확하고 견고하다. 그리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실려있다.
그 옛날, 대 작곡가 얀 시벨리우스에게서 피아니스트가 아닌 인간의 연주라는 찬사까지 받았던 연주. 그렇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빌헬름 켐프의 연주를 감상해보시기 바란다.
Wilhelm Kempff (piano)
녹음: 1964/01 Stereo, Analog
장소: Beethoven-Saal, Hannover
전악장 연속재생
I. Alleg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