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Choral''(Furtwangler. 19420419)
나치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음악회를 지휘한 푸르트벵글러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괴링(얼굴 잘림), 히틀러, 괴벨스의 모습이 보인다. 이미지 출처 : 이영록의 음악 페이지(http://my.dreamwiz.com/fischer/Furtwangler/Furtwangler.htm)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남긴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음반들 중에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음반이 하나 있다. 바로 1942년 4월 19일,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실황 음반이다. 이 음반에 대해선 예전에 짧은 동영상을 소개하며 남긴 글이 있다.
1942년은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4월 19일은 소련과의 전쟁이 극에 달해 있던 때였고 이에 대전투 강령인 지령 41호를 발동한지 2주가 되는 날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독일출신의 작곡가인 베토벤과 바그너를 그토록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바그너의 경우(바그너야말로 히틀러와 정치적인 코드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이었기에)엔 그의 며느리를 또한 극진히 대접해주기도 하는 등의 배려를 하였다.
광란, 광풍의 시대. 이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살아야 했던독일출신의 가장 위대한 지휘자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있어서 나치에의 협력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모든 것을 다 훌훌 털어버리고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용기를 보여준토스카니니와 달리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여린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진 푸르트벵글러는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진 않았다고 한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악단의 유태인 출신 단원들의 생명을 보호하고자 내린 고뇌에 찬 결단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나치 부역행위는 1%도 속일 수 없는 사실이며 이는 그의 예술인생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1942년 3월 22일 베를린 필과 함께 한 녹음 이후 한 달만에 푸르트벵글러는그의 분신인 베를린 필과 함께 다시금 9번 교향곡을 연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날의 공연은 라디오를 통해 독일을 비롯한 나치 점령국 전체에 울려퍼졌다.
전악장 연속재생
지휘자 입장. 관중의 박수소리
1악장
2악장
3악장
4악장